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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금)

사라질까 살아갈까…2025년 새해 33가구만 남았다, 두지마을에서의 한 달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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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 두지마을 앞 들녘은 쭉 뻗어 섬진강까지 닿았다. 마을 뒤 야산엔 대나무 숲이 우거졌다. 김녕 김씨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1970년대만 해도 120여가구가 살았다. 야산에는 대나무가 아니라 집들이 빼곡했다. 마을이 크다 보니 우물이 2개 있는데, 윗 우물 쪽에 살면 ‘웃물 산다’, 아래 우물 쪽에 살면 ‘아랫물 산다’고 했다. 주민들은 마을 앞 들판에서는 벼농사를 짓고, 물 빠짐 좋은 강변에는 ‘무시(무)’를 심었다. 마을 입구에 양곡 창고 딸린 농협연쇄점(하나로마트)이 있을 정도로 크고 부유한 동네였다.

2025년 새해 33가구만 남았다. 70~90대 노인이 대부분이다. 주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뭐에 울고 뭐에 웃으며 지낼까. 10년 뒤 마을은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기자가 두지마을에 한 달 살이를 하며 주민 일상을 취재했다.

[남태령을 넘어] ①“농사짓겠다고 남은 젊은 애들이 걱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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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군 풍산면 ‘두지마을’ 주민들이 지난 11월 27일 마을입구에 있는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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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내린 날


두지마을에서 가장 복작거리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마을 입구에 있는 할머니 경로당이다. 김씨 집안으로 시집온 ‘아짐’들의 휴식처다. 이 마을은 할머니를 ‘아짐’, 할아버지는 ‘아재’라고 부른다. 벼 수확이 끝나고 농한기가 시작되면 아짐들은 경로당에 모여 함께 밥을 먹는다.

할머니 경로당 위쪽에 있는 예전 마을회관, 지금의 할아버지 경로당이 더 널찍하고 방도 하나 더 있지만 문은 주로 잠겨 있다. 아재들은 대부분 세상을 떴다. 부부가 함께 사는 고령 가구는 대여섯 집이다.

‘삼총사’라 불리는 김순례(71)·박미순(70)·장순금(73) 아짐은 매일 할머니 경로당으로 출근한다. 점심밥을 차리고 군청으로부터 ‘급식 도우미’ 수당을 받아 셋이 나눈다. 순금 아짐이 냉장고 쓱 한번 보고 “오뎅탕” 결정하면, 미순과 순례 아짐은 “무시가 더 있어야 시원한디” 하며 무를 몇개 꺼내 나박나박 썬다. 집에서 반찬 한두 개 놓고 혼자 먹는 것보다, 찌개 끓이고 반찬도 여러 개 놓고 함께하는 식사가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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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군 풍산면 두승리 ‘두지마을’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들이 함께 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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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성님’들은 큰 방 텔레비전 앞에 앉아 점심이 다 되길 기다린다. 몇몇은 미지근한 물이 담긴 2ℓ짜리 물통을 베개 삼아 눕는다. 한겨울인데도 물통 베개가 시원해서 좋단다. 요양원에 가 계신 분을 빼고, 마을에서 연세가 가장 높은 성님은 1931년생 양옥금 아짐(94)이다.

지난해 11월27일 아침 8시30분.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경로당 요리사’ 미순·순금 아짐이 마을 앞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순창에 대설주의보가 발령됐다. 서울에선 117년 만에 11월 중 최대 적설량을 기록한 날이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던 80대 성님들이 눈을 보며 혀를 찼다. “하이고메, 심란해서 어째 가?” 이 마을 아짐·아재 8명은 일주일에 3번 마을 청소를 하고 ‘공공일자리’ 수당으로 월 30만원씩을 받는데, 2025년에도 일을 계속하려면 이날 면사무소로 가서 신청해야 한단다.

두지마을을 지나는 시내버스는 하루 8대뿐이다. 버스 타면 20분 정도 걸린다. “이렇게 불편한데 차 없이 어떻게 살아요” 묻는 기자에게 미순 아짐이 말했다.

차는 많이 다니제. 옛날엔 아침에 두 번, 저녁에 두 번밖에 없었어. 그땐 걸어다녔응께
- 박미순 아짐(70)


성인이 빠른 걸음으로 가도 1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다. 그나마 두지마을이 있는 풍산면은 교통이 좋은 축에 속한다. 내장산·회문산·강천산 자락에 있는 복흥면, 쌍치면, 구림면, 팔덕면 등에는 버스가 안 다니는 오지 마을이 꽤 있다. 순창군에선 교통 오지 주민을 위해 1000원에 이용할 수 있는 마을택시를 운영한다. 두지마을엔 ‘천원 택시’가 다니지 않는다.

풍산면사무소가 위치한 면 소재지에는 풍산초등학교와 보건지소, 작은 도서관과 목욕탕이 있다. 농협 하나로마트도 있는데 규모는 작고, 매대에는 신선 채소가 없다. 쌀이나 잡곡 같은 양곡이나, 라면·빵 따위 가공식품이 대부분이다. 우유는 하루 걸러 들어온다. 손님이 많지 않으니 유통기한이 긴 것 위주로 진열해 두는 것 같았다.

결국 장을 보려면 순창읍으로 나가야 한다. 매월 1과 6으로 끝나는 날 읍내에 장이 선다. 장날에는 순창군 내 모든 버스가 운행 노선을 바꿔 장터를 지난다. 장날엔 인근 버스터미널 승차장에 간이의자가 여러 개 놓인다. 장을 본 어르신들은 “(농한기라서) 어차피 집에 가도 논다”며 의자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한다.

이날 두지마을 아짐들의 공공일자리 신청은 오전 10시도 못 돼 끝났다. 두지마을로 돌아가는 버스는 2시간30분 뒤에 온다. 자칫하면 경로당 점심 준비를 순례 아짐 혼자 할 판이다. 이날 아짐들은 경향신문 취재차를 타고 마을로 복귀했다.

농촌의 ‘N잡러’들


경로당 요리사 삼총사가 점심을 차리고 있을 때, 같은 연배 전정순 아짐(73)은 상아색 마티즈를 끌고 인근 마을 치매 환자를 돌보러 갔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일상생활을 하기 힘든 노인들을 보살피는 요양보호사 일을 한다. 지금은 대나무 숲으로 변한 웃물 출신인 그는, 스물두 살에 아랫물 사는 남자와 중매로 만나 혼인했다.

마을 입구 주차장에 마티즈가 없으면 아짐들은 “혜숙이네 일 갔나 보네” 한다. 혜숙은 정순 아짐의 첫째 딸이다. 혜숙이라는 이름을 지어놨는데 면사무소에 간 친정아버지가 ‘미자’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했단다. 본명은 ‘미자’지만, 두지에서는 ‘혜숙이’라고 부른다.

정순 아짐은 딸만 내리 다섯을 낳고, 서른 즈음에 아들을 얻었다. 그때까지 시부모의 한 소리를 들었다. 들일을 할 땐 애들 봐줄 사람이 없어서 ‘고무 다라이’에 애들을 앉혀놓은 뒤 양산 씌워놓고 일을 했다.

남편은 서 마지기(600평·1983㎡) 논에서 벼농사를 했다. 서 마지기로는 육남매를 키우기 힘들었다. 머리에 생강 바구니를 이고 읍내 가서 팔았다. 무시 장사도 했다. 칫솔 공장, 메리야스 공장, 고추장 공장, 식당 등을 다니다 요양보호사가 됐다. 최저시급이지만 돌보는 대상자가 많으면 일하는 시간도 길어져 공공일자리보다 더 높은 급여를 받는다. 가까이는 순창 유등면부터 멀리는 남원 대강면까지 일하러 다녔다. 남편은 2002년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에는 정순 아짐이 주 5일 하루 3시간씩 9년 동안 모셨던 유등면에 사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식당에서 주방장 하던 할매였다. 그날 아침밥을 끓여서 묽게 드려도 전혀 잡수지를 못했다. 병원으로 모신 지 1시간 만에 눈을 감았다.

내가 안 갔으면 (돌아가신 채) 며칠 계셨을 수도 있제. 나도 혼자 있으니께 이런 생각이 계속 들어. 자다 죽어 불지도 모른다고. 집안일 하기 싫어서 옷도 막 벗어놓고 그럴 때가 있거든. 근디 내가 갑자기 죽어 불면, 사람들이 보고 ‘전정순이 이렇게 살았나’ 하면 우째. 그래서 깨끗하게 치워놓고 허는디….
- 전정순 아짐(73)


이 마을엔 40·50·60대 ‘청년’도 있다. 33가구 중 9가구다. 이 마을에서 짧게는 7년, 길게는 36년 살아온 귀농·귀촌인들이다. 서울 살던 김효진(55)·김선영(51)씨 부부는 처음에는 순창 금과면으로 귀농했다가, 너른 들녘에 반해 두지마을로 왔다.

부부는 논 여러 배미를 빌려 총 60마지기 땅(1만2000평·3.97㏊)에서 친환경 벼농사를 지었다. 순창에서 60마지기면 ‘중농’ 정도 되는 규모다. 아내 김선영씨는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마다 순창읍 보습학원으로 달려가 강사로 일했다.

지주들에게는 임차료로 1마지기당 쌀 한 가마(80㎏)씩 줬다. 1년 땅 빌리는 값으로 총 60가마, 약 1200만원 되는 돈이 빠져나갔지만, 쌀 팔고 직불금 받고 강사 월급까지 더하면 넉넉하지는 않아도 먹고살 만했다.

부치던 논은 3년 전 반 토막 났다. 논 주인이 남원의 묘목 재배업자에게 논을 빌려주기로 했다며 부부와 맺은 계약을 취소했다. 남편 김효진씨는 “업자가 임차료를 3배 올려 주겠다고 하는데 땅 주인 귀가 솔깃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 김씨는 그때부터 산불감시원 일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논두렁을 태우거나 쓰레기 태우는 것을 단속하고, 불이 나면 진화 작업까지 맡는다. 봄에 3개월 반, 가을엔 한 달 반가량 하는 한시적 일자리이지만, 월급으로 180만~190만원 정도 받는다.

“시골에선 그만한 돈벌이가 또 없어요. 경쟁률이 엄청 높아서 우스갯소리로 ‘군수 빽’ 있어야 한다고도 하죠.”
- 김효진씨(55)


아내 김씨도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몇년 전부터 면 소재지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계약직 관장으로 일한다.

지난해 11월24일. 두지마을에서 면 소재지 방향으로 10분쯤 걸으니 4층짜리 아파트 두 동이 나타났다. 두지마을 주민들이 다녔던 오산 국민학교(초등학교)가 1999년 폐교된 후, 운동장 부지에 세워진 주공아파트다. 경비실에 이용희씨(56)가 앉아 있었다. 그는 두지마을 이장이다. 경기 화성 동탄에 살다가 13년 전 이주해 아파트 경비로만 10년을 일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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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군 풍산면 두지마을 이장 이용희씨가 마을 인근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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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 농사 안 짓는 이장이라니…. 생경했다. 이씨가 모니터 화면에 풍산면 지도를 띄우더니 한 곳을 확대해 보여줬다. 경비 일을 시작했을 무렵 이곳 땅 200평을 겨우 구해 복분자를 심었다고 했다. 경비는 격일로 하고 농사는 쉬는 날 지었다. “밭은 일이 많아요. 쉬는 날 밭일 하러 가야 하는데 중간에 마을 일도 하고 행사도 가야 하고…. 이런 데 쫓아다니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도 밭에 못 갈 때도 있었어요.” 복분자 농사는 3년 만에 관뒀다.

아내 전혜경씨(57)는 5년 동안 순창군청에서 계약직 직원으로 일했다. 읍내 초등학생 대상으로 논술 과외도 했다. 군청 일을 그만두고는 청소년 상담사 자격증을 땄다. 현재 구직 중이다.

도시에 살던 이들이 농촌에 가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농촌에 많이 있는 영농조합이나 농업회사 법인에서 사무·회계 등의 일을 맡거나, 군청에 들어가 계약직 직원으로 일할 수 있다. 이외에도 가축방역 업무 보조, 목욕탕 청소, 방과후 수업 강사, 생활지원사 등 ‘작은 일자리’가 많다고 두지마을 귀농·귀촌인들은 전했다. 다만 일 년 중 특정 시기에만 일하거나, 하루 중 반나절 정도만 일하는 등 큰돈을 버는 일은 아니다.

그중엔 기자 일도 있다. 2013년 두지마을 귀촌 후 친환경농산물 유통 일을 하는 구준회씨(48)는 칼럼니스트(전북일보 필진)에, 지역지 기자(열린순창 객원기자)로도 활동했다. 다만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한 건 군청에서 일하는 아내 전수진씨(48)의 공무원 월급 덕분이다.

풍산초와 인재숙


두지마을 최연소자는 구준회·전수진씨의 아들 자민(9)이다. 자민이는 면 소재지에 있는 풍산초를 다닌다. 곧 3학년이 된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일곱 살 터울 누나 자은(16), 이장 부부 이용희·전혜경씨의 딸 채은(21), 농부 부부 김효진·김선영씨의 아들 주하(23)·딸 승하(18) 등 두지마을 이주민의 자녀들은 모두 풍산초를 나왔다.

지난달 19일 풍산초 강당에서 열린 ‘풍산초 예술제’. 짧은 영상 십수 편이 연달아 상영됐다. 전교생 19명이 각자, 혹은 짝을 이뤄 찍은 영화다. 자민이는 찰흙으로 공룡 인형을 만들어 한 프레임씩 사진을 찍고, 여러 장을 이어 붙여 영상으로 만들었다. 선생님과 학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학생 19명이 제작 소감을 밝혔다. ‘공룡 영화’ 감독 자민이는 “만드는 게 힘들었는데 완성된 작품을 보니 재밌다”고 했다.

2010년 즈음 풍산초는 폐교 위기를 맞았다. 신입생이 3명 이하로 줄었다. 학부모와 교사들은 풍산초를 ‘혁신학교’로 만들기로 했다. 혁신학교란 소규모 학급으로 운영하면서 교육 과정에 더 자율성을 갖는 학교를 말한다. 풍산초는 2011년 전북의 첫 혁신학교가 됐다. 학부모들은 아침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줬다. 2020년에는 그림책 만들기 수업도 생겼다. 이날 강당 뒤쪽엔 전교생의 그림책이 일렬로 전시됐는데, 자민이의 그림책도 있었다. 자민이는 <공룡이 살아난다면 대작전>과 <비누의 여행>을 펴낸 그림책 작가다.

3년 전부터 순창의 사회적협동조합 ‘우리영화만들자’와 함께 영화 제작 수업을 진행했다. 지난해 6월에는 전교생이 참여한 8분짜리 판타지 영화 <내 이름은 색깔>이 학교 강당에서 상영됐다. 영화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인 풍산초 학생이 ‘색깔 요정’을 만난다. 교실을 칠하는데, 빨강·노랑·파랑 등 색이 달라질 때마다 학생들의 감정이 변한다. 한 가지 색깔이 아닌 모든 색이 한데 어우러질 때 가장 행복해진다는 얘기를 담았다. 시나리오는 풍산초 학생들이 공동으로 썼고, 배역도 풍산초 학생들이 맡았다. 자민이도 ‘기차놀이 하는 학생’ 역할을 맡았다.

이날 예술제에서 만난 김영연 우리영화만들자 대표가 말했다. “맘껏 상상력을 펼치게 해주고 싶었어요. 아이들과 선생님께는 ‘스토리가 망가져도 좋다, 하는 동안은 즐겁게 하자’고 했죠.”

이들에게 작은 학교는 희망이자 위기다.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맞춤식 수업을 하고 ‘예술제’ 같은 특색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지만, 관계 맺을 수 있는 친구가 적고 매년 폐교를 걱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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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군 풍산초등학교 예술제. 방송제와 그림 전시회등 10 여명의 전교생이 참여해 만드는 연례행사다.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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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에서도 읍을 제외한 면 지역 초등학교 학생 수는 계속 줄고 있다. 순창읍 초등학교가 학생 수 200명을 넘기는 것과 달리, 면 지역 학교들은 이제 40명을 넘는 곳이 없다. 풍산초 등 5개 학교는 전교생 수가 20명이 채 안 된다. 아이들이 학교 다닐 나이가 되면 읍에 있는 아파트를 구해 사는 경우가 많단다. 아이들은 순창읍 초등학교와 학원으로 가고, 부모들은 면 지역 논밭으로 출퇴근한다.

박붕서 풍산초 교장은 “학부모들이 읍내에 더 많으니까 학교가 지역 주민들과의 연결 지점이 없어지고 있다”며 “이젠 면 지역에서 초등학교 폐교는 얘깃거리도 안 될 정도”라고 했다. 농부이자 작은 도서관장인 김선영씨는 딸 승하가 풍산초를 졸업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매주 목요일이면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러 간다. 김씨가 말했다.

지역을 누구보다 잘 아는 주민들이 학교를 지켜야 해요
- 김선영씨(51)


이날 자민이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읍내에 있는 돌봄센터로 갔다. 돌봄센터는 일하는 부모들을 위해 초등학생 자녀들을 돌봐주는 곳이다. 풍산초 예술제에서 영상 제작 소감을 발표한 학생들도 있었다. 몇몇은 이주배경 아동이다.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이 베트남 문화 수업을 진행했다. 한 아이가 칠판 앞으로 나와 온몸으로 단어를 설명하면, 다른 아이들이 베트남어로 정답을 맞히는 ‘몸으로 말해요’ 게임이 시작됐다.

자민이가 손으로 커다란 나무 모양을 그리고, ‘반짝반짝’ 손짓을 하니 아이들이 “꺼이통(크리스마스트리)”이라고 말했다. 긴 수염이 나 있고 커다란 선물 주머니를 들고 가는 사람은 “옹자 노엔(산타 할아버지)”, 이 할아버지가 타고 다니는 무언가는 “쯔엇 두엔(썰매)”이다. 센터에서는 중국 문화 수업도 진행한다.

다른 마을은 이주 배경 가정이 많은데 왜 두지마을에는 없을까. 농부 김효진씨의 말이다.

다른 곳을 가면 내 나이 언저리 되는 분들이 ‘노총각’이 되면서 이주여성하고 많이 결혼했어요. 근데 우리 마을은 그 나이대 되는 남자도 없었던 거죠. 다 도시로 나가고. 유등면에는 베트남 여성들이 있어요. 금과면엔 통일교 순창 교회가 있는데 (한국인 신도와 결혼해 이주한) 일본 여성 신도들이 살아요.
- 김효진씨(55)


중·고등학교는 대부분 순창읍에 있다.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한다. 읍내 학원에는 ‘수능 대비반’ ‘명문대 대비반’ 대신 ‘인재숙 대비반’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붙었다. 인재숙은 2003년 순창군에서 만든 입시 대비 기숙학원이다.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순창 학부모들이 전주·광주로 이사하는 걸 줄여보자는 취지에서 설립됐다. 순창읍 외곽 인재숙 건물 외벽엔 ‘순창을 넘어 대한민국의 별이 되자’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예비 중3부터 예비 고3을 대상으로 국어·영어·수학 시험을 본다. 학년별로 50여명씩 성적순으로 선발한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마치면 인재숙으로 와서 서울 학원가 출신 강사들의 강의를 듣고 늦은 밤까지 자율학습을 한다. 부모들은 식비(월 25만원)만 내면 된다. 연간 15억원이 운영비로 쓰인다. 인재숙은 설립 직후부터 ‘군청이 사설 학원을 운영한다’ ‘공부 잘하는 애들만 뽑아 지원한다’ 등의 지적을 받았다. 인재숙 설립에 반대하며 농민들이 순창군청에 똥물을 뿌린 일은 순창에서는 유명한 일화다. 인재숙 때문에 순창에 남았다는 이들도 있다.

‘이장 딸’ 채은도 중·고등학생 때 인재숙 생활을 했다. 엄마 전혜경씨가 말했다.

식대만 내면 밥 주고 재워주고 공부 가르쳐주고 완전 거저지. 채은이 가르칠 때 돈이 많이 안 들어갔어요. 거기 가 공부만 하는 애들이 불쌍하긴 한데…. 그래야 성적도 오르니까 우리나라 현실에는 맞지 않나 생각도 해요.
- 전혜경씨(57)


인재숙이나 학원 외에 방과 후 청소년들이 갈 만한 곳은 거의 없다. 맛집 찾기도 힘들다. 구준회씨 첫째 딸 자은이는 남원·전주·광주에는 있는 프랜차이즈 ‘○○떡볶이’가 순창에 없는 걸 아쉬워한다. 아이들이 놀 공간도 마땅치 않다. 부모들은 쉬는 날 아이를 데리고 광주로 간다.

‘소장’이 된 간호사


순창읍 내 20여개 병원은 내과·치과·한의원·요양병원 등이 대부분이다. 산부인과는 없다. 소아과는 내과 병원에서 같이 봐주는데,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순창의 내과 대신 남원·전주·광주에 있는 소아과를 찾아간다. 자은·자민 엄마 전수진씨는 자민이를 가졌을 때 전주 산부인과를 다녔다. 첫째 자은이가 7살에 뇌수막염으로 입원해야 했을 때도 전주 대학병원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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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군 풍산면 두지마을 옆 대가마을 ‘오산진료소’에서 두지마을 어르신들이 진료를 받고 있다. 오산진료소는 간호사 한 사람이 근무하는 시골마을 의료기관이다.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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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에 순창보건의료원(보건소)이 있지만 주민들은 이곳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 컴퓨터단층촬영(CT) 같은 첨단 장비는 있는데 판독할 영상의학과가 없다. 공중보건의가 바뀔 때마다 진료 과목이 바뀌어 치료를 못 받기도 한다. 다만 순창에서 ‘24시간 응급실’을 운영하는 곳은 이 보건소뿐이다.

추석 때 풀을 베고 두드러기가 올라와 밤중에 응급실에 갔죠. 주사 놔주고 약을 줬어요. 전혀 괜찮아지지 않더라고요. 결국 광주 병원에 갔어요. 의사가 열 알레르기라고 하더라고요. 간지러움 때문에 사람이 미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니깐요.
- 구준회씨(48)


아는 언니가 전동 전지가위로 작업하다가 손가락 끝이 살짝 잘렸어요. 보건소에서 꿰맸는데, 손가락이 괴사하기 시작한 거죠. 광주로 가서 수술했어요.
- 금과면 주민 김현희씨


반면, ‘리(里)’ 단위 보건소 산하 보건진료소는 주민들에게 인기다. 두지마을 아짐들은 “쪼께 감기 들고 아프면” 두지마을과 대가마을 사이에 있는 보건진료소를 찾아간다. 걸어서 5분 거리다. 순창읍의 보건소와 풍산면의 보건지소에는 공중보건의가, 마을 보건진료소엔 간호사가 근무한다. 시골 마을에서 일하려는 의사들이 없다 보니 간호사를 교육해서 진료를 맡긴 것이다. 간호사인 보건진료소장은 감기와 같은 1차 질환을 진료한다. 혈압약·당뇨약도 처방할 수 있다.

지난달 10일 두지마을 아짐이 보건진료소를 찾았다. 왼쪽 발에 깁스를 했다. 김장 때 삐끗해서 왼쪽 발가락을 다쳤단다. “이미 나샀다. 불편해서 얼른 풀고 싶다” “어머니 있잖아요. 풀면 다시 뼈가 어긋나요. 안 돌아다니셔야 하는데 자꾸 돌아다니시니까 이렇게 단단히 싸매버린 거예요” “안 움직일 수가 있나” “긍께 어머니 저녁에 꼭 다리를 올리고 주무세요. 붙으면 병원에서 (깁스) 빼주실 거예요.”

이 마을 보건진료소장은 10년 전 순창에 와서 오지 보건진료소 여럿을 돌아다녔단다.

어르신들에게 생각보다 우울증이 엄청 많으세요. 여기서 처방은 못하지만 여쭤보면 불안장애 약, 불면증 약도 많이 드시고요. 남편과 자식이 먼저 세상을 뜬 분도 많고요. 두 집 걸러 빈집인 마을이 많아요. 혼자 자는데, 잠도 오지 않는데 빈집에서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까지 들려봐요. 신경이 곤두서죠
- 마을 보건진료소장


굴러온 돌, 박힌 돌


15년 전만 해도 두지마을은 정월대보름이면 마을회관에 제사상을 차리고 당산제를 지냈다.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지내는 제사다. 원래는 마을에서 농악 가락에 맞춰 당산나무가 있는 마을 뒤 야산까지 올라 제를 지냈는데, 주민들이 나이 들면서 마을회관에서 간소하게 한다.

당시 귀농·귀촌 청년들은 마을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나마 기웃거린 행사가 당산제였다. 여성과 아이는 참여할 수 없었다. 2012년 2월5일 정월대보름을 끝으로 당산제가 사라졌다. 당산제를 이어갈 청년들은 없었고, 제사상을 차리는 아짐들도 힘들어했다. 당산제 폐지를 계기로 귀농·귀촌 청년들이 뭉쳤다. “우리에게 곁을 내준 마을인데 우리도 제 역할을 해보자”며 마을에서 사라진 청년회를 새로 꾸렸다. ‘굴러온 돌’이지만 이제는 ‘박힌 돌’로 살자며 이름을 ‘파킹스톤’(박힌 돌)이라 지었다.

당산제 대신 뭘 할 수 있을까. 정월대보름 행사인 ‘달집태우기’는 여성과 아이들도 참여할 수 있다. 청년회에서 달집태우기를 해보겠다고 하니 아짐·아재들도 흔쾌히 나섰다. 청년회는 아재들에게 볏짚 꼬고 이엉 엮어 ‘달집’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2013년부터 두지마을에선 정월대보름 달이 떠오를 때 주민들이 달집에 불을 질러 액을 쫓고 복을 부른다.

아재들은 마을 앞 들녘이 훤히 보여야 재물이 들어온다며 오래전 문 닫은 농협연쇄점과 양곡 창고를 없애고 싶어 했다. 청년회는 지자체 공모 사업을 따내 창고는 ‘두레방’이라는 이름의 마을 사랑방으로 재건축하고, 마을 앞을 가리는 연쇄점 건물은 허물었다. 두레방은 공동 주방, 북카페, 요가교실, 회의실 등으로 쓰인다. 귀농·귀촌 가구도 9가구로 늘었다.

경향신문

첫눈이 내린 지난 11월27일 전북 순창군 풍산면 ‘두지마을’ 주민들이 우산을 쓰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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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회도 나이를 먹었다. 자녀들은 대부분 대학에 진학해 마을을 떠났다. 아재·아짐들은 세상을 등졌다. 지난해에도 세 분이 돌아가셨다. 아짐들이 마을에서 보이지 않으면 어김없이 요양원에 가 계셨다. 주민은 줄고 빈집은 는다.

7년 전 마을 주민이 된 조선영씨(50)가 사는 집 주변 5개 집 중 3곳이 빈집이다. 주변이 비어 가는 것을 보며 ‘마을이 사라진다’는 말을 실감한다. 조씨가 말했다.

내가 무슨 일 생겼을 때 바로 뛰어올 수 있는 거리에 아무도 안 살까 봐...그게 두려워요
- 조선영씨(50)


도시 사는 자녀 세대들은 어르신들이 살던 집을 잘 팔지 않는다. 요양원에 있는 어르신들이 파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르신이 세상을 떠난 집 자녀들 몇몇도 제 살던 집 그대로 남겨두길 원한다. 등기가 안 돼 있거나 소유주가 여럿이라 거래가 불편한 빈집도 있다. 빈집은 폐가로 변한다. 집을 허무는 데 큰돈이 들다 보니 흉물로 남는다. 살 집을 찾으러 두지마을에 온 귀농 청년들이 집을 못 구해 돌아갈 때가 많다.

지난달 9일 마을 청소를 마친 아짐들이 경로당에 모였다. 뉴스에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위로 헬기가 날고, 군인들이 창문을 깨고 의사당 내부로 진입하는 장면이 며칠째 반복됐다. 아짐들이 한마디씩 했다.

“계엄령 내리면 사람들이 다 죽어버릴 수도 있는데 왜 그 짓을 한 겨. 얼마나 못된 짓을 한 건지 몰러.” “시방 뭣이 돌아가겠는가 이렇게 난리가 났는디.” “국민들이 잘하라고 뽑아주니께 계엄령을 내리냐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우리는 안 뽑았어.” “아이그메 너무 열을 냈네, 머리가 아파부네.”

10년 뒤 두지마을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주민들을 한데 뭉치게 한 달집태우기가 당산제처럼 사라질 수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경로당에서 함께 밥 먹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눌 이웃들이 남지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 박채연 기자 applaud@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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