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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금)

야스쿠니, 그리고 끝나지 않은 싸움 [특파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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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본 도쿄 지요다구 야스쿠니신사의 문 ‘도리이’ 모습. 도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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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재 | 도쿄 특파원





지난 8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야스쿠니신사에는 차가운 겨울 공기가 낮게 깔렸다. 신사 초입, 인간의 땅에서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경계인 첫번째 문 ‘도리이’를 만난다. 무려 25m 높이의 거대한 입구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작은 건널목을 지나 두번째 도리이, 세번째 도리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세번 넘어 본전을 마주할 수 있다.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본전 앞마당이 끝이다. 그 뒤로 영새부 봉안전이 자리하고 있다.



본전에는 ‘신체’로 불리는 거울과 칼이 놓여 있다. 야스쿠니에 합사될 이들의 명단 ‘영새부’를 ‘신체’에 비추면 죽은 자들의 영혼이 칼과 거울에 깃들며 신이 된다는 것이다. ‘합사’란 여러 혼령을 한곳에 모아 제사를 지낸다는 뜻인데 ‘신체’를 통해 합사된 혼령 전부가 한덩어리의 신이 된다.



잘 알려진 대로 야스쿠니신사에는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이나 내전 때 숨진 이들의 혼령이 합사돼 있다. 1867년 메이지유신 직후 군부인 막부 세력과 일왕을 다시 세우려는 존왕파 간 내전인 무진전쟁(보신전쟁·1868~1869년) 희생자부터 시작됐다. 태평양전쟁 에이(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것은 1978년이다. 야스쿠니신사 누리집은 “오로지 ‘나라의 태평함’을 일념으로 존귀한 생명을 바친 이들의 혼령들이 모셔져 있으며 그 수가 246만6천기에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야스쿠니 봉안전에는 합사된 이들의 영새부가 놓여 있다. 이 안에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이름이 포함됐다. 일본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야스쿠니신사 문제 자료집’(1976)에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이 2만636명, 일본 도쿄신문의 1995년 기사에는 2만1181명으로 기록됐다. 어처구니없게도 야스쿠니신사는 “과거 일본인으로서 싸우다 숨진 대만 및 한반도 출신 … 대동아전쟁 말기에 이른바 전쟁범죄인으로 처형됐던 이들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가족이나 조상이 침략국의 전쟁범죄자들과 한덩어리가 된 유족들은 원통함을 토로한다. 한 유족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무 억울합니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지금 상태라면 제 아버지는 일본군에 지원한 것이 되고, 또 전범으로 모셔지고 있는 것이 됩니다. 아버지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라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동원되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한국인 유족 416명이 야스쿠니신사 합사 취소 소송을 처음 제기한 게 2001년 일이다. 첫 소송은 10년에 걸쳐 3심에 해당하는 최고재판소(우리의 대법원)까지 갔지만 패소했다. 지금까지 한국인 유족 등이 세차례, 일본인 유족들이 두차례 등 모두 다섯차례 소송이 있었다. 일본 재판부는 단 한번도 유족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는 17일 일본 최고재판소 제2소법원에서 한국인 유족들이 2013년 시작한 소송의 최종 판결이 내려진다. 일본 언론들은 “2심 결론을 바꾸는 데 필요한 변론이 열리지 않았다”며 유족 쪽이 패소했던 1·2심 결론 유지를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25년 가까이 법정 투쟁을 벌여온 유족들은 또다시 패소하더라도 대를 이어 싸움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야스쿠니와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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