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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칼럼] 윤석열도 이재명도 싫다는 국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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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윤석열도 싫지만 이재명도 싫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제왕적 대통령도 싫지만, 상왕적 국회도 짜증난다는 얘기와 비슷한 맥락이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가면서도,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의구심이 든다. 윤석열과 이재명만 없으면 다 괜찮아지는 건가. '애초에 그들을 지도자로 세운 게 누군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한국 정치판의 규칙은 심플하다. 타협은 없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무한정 어깃장을 놓는 비토크라시(vetocracy) 검투장이다. 하드웨어적인 원인이 뭔지는 모두가 안다. '87체제', 낡은 헌법이 말썽이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과 여소야대의 이중 권력에 대한 고려가 극도로 부실하다. 해결 방법은 개헌뿐이다. 이 또한 모두가 알고 있다. 다만 적극적인 교정이 실행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한 번 속으면 피해자지만, 두 번 속으면 바보고, 세 번 속으면 공범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저질 정치가 지속되는 건 악질적 공범 관계가 공고하다는 뜻이다. 이것부터 깨뜨려야 실패가 되풀이되지 않는다.

일단 엘리트 정치인의 공범 혐의는 뚜렷하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렇다고 지금 겪고 있는 정치적 격랑을 온전히 낡은 헌법과 정치인, 정당 탓으로 돌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공범이 더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직선 대통령에 포획된 국민이다. 필자를 포함한 '우리'가 적대적 공범 관계의 한 축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 국민은 성장 환경이 비슷한 덕분에 정서적 공통분모가 많다. 그와 동시에 편을 나눠 의견을 규합하는 것에도 익숙하다. 정치 용어로는 쏠림현상과 참여의식이 강하다. 이런 성향이 87체제와 부정적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괴물을 만들었다.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에 대한 집착이다.

내가 뽑은 대통령은 지켜야 하고, 남이 뽑은 대통령은 인정하지 않는 것을 넘어 거꾸러뜨리고 싶은 대중심리는 저질 정치의 자양분이 된다. 이런 광기가 우리 정치판에서 자제와 배려의 씨를 말려 버린 것은 아닐까. '국민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의 명언과도 일맥상통하는 합리적 의심이다.

개헌 설문조사를 해보면 국민이 가장 선호하는 권력 구조는 대통령 중임제다. 숱한 부작용에도 국민은 여전히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기 원한다는 뜻이다. 의원내각제, 이원정부제가 더 낫다고 여기는 전문가 집단과는 딴판이다.

4·19 직후의 혼란과 군부 독재의 트라우마 탓이 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직선 대통령제의 강을 건널 때도 됐다. 내가 뽑은 대통령이 카리스마 넘치게 국정을 만기친람하는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릴 때가 됐다. 동시에 내가 찍지 않은 대통령이 풍비박산하는 것에 박수 치는 행태도 그만뒀으면 한다.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된다면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 애증의 대통령제를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조기 대선을 개헌과 연계해 권력 구조 개편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어야 한다. 가급적 빨리, 가급적 많은 토론의 장을 여는 게 관건이다. 정보를 충분히 제공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을 보장해줘야 한다. 어차피 선택은 국민 몫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국민들이 의원내각제를 유력한 대안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정상이다. 굳이 대통령제를 유지한다면 힘을 과감히 덜어내는 이원정부제 등도 검토 목록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겪는 정치적 혼란은 윤석열, 이재명만의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이 사라져도 유권자가 바뀌지 않는 한 실패 리스크는 고스란히 남는다. 이제 대통령제를 박물관으로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이진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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