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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4 (금)

순백의 겨울, 한탄강 물 위를 걷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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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관광지였던 강원도 철원은 요즘 생태관광 중심지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한탄강 현무암 협곡 길을 걷고, 철원평야에서 겨울의 진귀한 손님 두루미를 눈앞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탄강 협곡 절벽에 낸 아슬아슬한 잔도인 주상절리길도 좋지만, 겨울에만 개방되는 ‘한탄강 물윗길’에 서면 순백의 얼음과 눈 쌓인 협곡이 스펙터클하게 다가온다.》


겨울에만 열리는 한탄강 물윗길. 철원군 직탕폭포에서 순담계곡까지 8.5km 구간 협곡을 부교를 따라 걸으며 주상절리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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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물 위를 걷다

물 위를 걷는다고? 아니, 예수님도 아닌데 어떻게?

급류타기로 유명한 한탄강 물 위를 걷는 한탄강 물윗길이 열린다는 소식에 귀를 의심했다. 그저 강변을 걷는 것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주 철원 동송읍 직탕폭포에서 태봉대교, 송대소, 승일교, 고석정, 순담계곡까지 8.5km 구간 한탄강 물윗길을 3시간 동안 걸으면서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한탄강 물윗길은 진짜로 강물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길이다. 강물에 뜰 수 있는 네모난 플라스틱으로 만든 부교(浮橋)가 겨울(10월 말∼3월 말)에만 임시로 설치된 것이다. 이 부교는 한탄강 수위가 올라가고 급류가 흐르는 봄이 오면 철거된다.

그래서 한탄강 겨울 절경을 색다른 시선으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강변 양쪽 절벽 주상절리, 기암괴석, 굽이쳐 흐르는 세찬 물소리까지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3D 아이맥스 영화 같은 체험이다.

우리말로 큰 여울을 뜻하는 한탄강(漢灘江)은 북한 평강에서 발원해 철원과 경기도 연천, 포천에 걸쳐 136km를 흐른다. 한탄강은 약 54만 년 전부터 12만 년 전까지의 화산 폭발로 분출한 용암이 식으면서 형성된 현무암이 침식돼 만들어진 깊은 협곡을 따라 흐른다.

한탄강 급류의 물보라가 얼어 고드름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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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한탄강을 걸으니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갈대밭 너머 꽁꽁 언 강물 위로 쨍한 햇볕이 내리쬔다. 눈 쌓인 강물 위에는 짐승 발자국만 가지런히 놓여 있다. 얼음장 밑으로 급류가 돌돌돌 소리 내며 흘러가기 때문에 사람은 건너기 힘들다. 급류는 바위에 부딪쳐 파도로 부서지고, 추운 날씨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물보라는 크리스털 왕관 같은 고드름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나이아가라폭포’로 불리는 직탕폭포에서 물윗길을 시작했다. 세로로 긴 다른 폭포와 달리 직탕폭포는 가로 80m가 넘는 강물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높이는 3m에 불과하지만 장관이다. 한탄강 본류 현무암 바닥이 침식으로 꺼져 생긴 계단식 폭포로 시원하게 물이 쏟아지는 모습은 영락없이 나이아가라를 닮았다. 물소리 들리는 주변 식당에선 한탄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끓이는 잡어 매운탕 맛이 일품이다.

부채꼴 모양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는 송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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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윗길은 태봉대교를 지나 송대소로 이어진다. 한탄강 맑은 물이 수심 30m 이상 깊은 소(沼)를 이루고 있는 송대소는 높이 30∼40m에 이르는 주상절리 명소다. 한탄강은 용암이 식으면서 육각기둥 모양으로 쪼개지는 주상절리(柱狀節理)와 널빤지 모양으로 쪼개져 시루떡처럼 수평으로 쌓이는 판상절리(板狀節理)가 잘 발달해 있다.

멀리 횃불전망대와 은하수교를 배경으로 송대소 주상절리가 왕관처럼 부채꼴로 펼쳐져 있다. 현무암 주상절리 기둥은 보석 덩어리처럼 보인다. 그런가 하면 노란색으로 빛나는 주상절리가 수직으로 내려꽂혀 있는 절벽은 마치 빈센트 반 고흐 유화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격정적인 붓질을 연상케 한다.

남북한이 번갈아 지어 완성한 한탄강 승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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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바위에서 1000원짜리 인스턴트 커피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빙벽폭포를 지나 승일교(承日橋)까지 걸어간다. 러시아나 동유럽 어딘가에서 만날 법한 아치형 콘크리트 다리인 승일교엔 치열한 현대사가 담겨 있다. 1948년 공산 치하였던 철원에 북한이 절반 정도 다리를 건설하다가 1950년 6·25전쟁으로 중단됐다. 전쟁 끝 무렵 남한이 나머지 절반을 지어 1958년 준공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 자와 김일성의 ‘일(日)’ 자를 합쳐 승일교로 불렀다는 설과 6·25전쟁 당시 박승일 장군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설이 내려온다.

한탄강 협곡엔 정자가 많다. 그중 고석정(孤石亭)은 철원 제일 명승지다. 강 한복판에 섬처럼 외롭게 서 있는 높이 약 15m 고석바위 양쪽으로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른다.

고석정이 유명해진 것은 조선 명종 때 의적 임꺽정(林巨正)이 은신하며 활동하던 배경이기 때문이다. 임꺽정은 고석정 건너편에 돌벽을 높이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 당시 함경도 지방으로부터 이곳을 통과해 조정에 상납하는 조공물을 탈취한 뒤 빈민을 구제하며 의적으로 불렸다. 고석바위에는 임꺽정이 숨어 지냈다는 자연 석실로 보이는 구멍이 있고, 건너편에는 석성이 남아 있다.

고석정부터 물윗길 종착점인 순담계곡까지는 널빤지나 시루떡 모양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판상절리가 장관을 이룬다. 물윗길을 걷기 시작한 지 3시간여. 드디어 순담계곡에 도착했다. 맞은편 절벽을 보니 ‘한탄강 주상절리길’ 안내판이 보인다. 한탄강 주상절리길은 철원뿐 아니라 포천, 연천까지 총 119km에 이른다.

물윗길을 걸으면서 요즘 유행하는 ‘절벽 잔도’ ‘구름다리’와 ‘부교길’(물윗길) 가운데 어떤 게 더 친환경적일까 생각해 보았다. 강 한가운데 설치된 부교가 처음엔 좀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어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물 위에 떠 있는 부교는 추운 겨울 한 계절만 놓였다가 철거되는 임시 구조물이어서 언제든 강 환경의 원상복구가 가능하다. 반면에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유행 중인 구름다리, 출렁다리, 잔도(데크길)는 수백억 원의 엄청난 예산이 들고 환경을 영구히 훼손한다. 또 지자체마다 출렁다리가 너무 많아지다 보니 지역의 개성을 잃는 측면도 있다.

철원 이길리 한탄강변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두루미. 김영호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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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미를 보며 평화를 얻다

철원은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스산해지고 추워지는 곳이다. 북이 판 남침용 땅굴이 있고, 금강산으로 가는 철도는 녹이 슬어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외치고 있으며, 서태지가 뮤직비디오를 찍은 ‘노동당사’는 동유럽 어디선가 무너져 내린 장벽처럼 서 있다. 쏟아지는 포격으로 산비탈과 병사들이 그야말로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고지, 백마의 흰 살결처럼 하얗게 변했다는 백마고지를 비롯해 수많은 젊은 병사가 산화한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벼를 베고 난 철원평야 황량한 논에서 뭔가를 주워 먹고 있는 두루미 한 쌍을 발견했을 때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졌다. 고고하게 긴 다리, 날개 끝 검은색 무늬, 정수리에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 고귀한 자태의 단정학(丹頂鶴)이다. 추수가 끝난 뒤 낙곡이 풍부한 비무장지대(DMZ) 민통선 내부 논과 저수지에는 평화롭고 포근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두루미와 재두루미, 독수리, 오리가 많다.

두루미 떼를 본격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두루미평화타운에서 해설사와 함께 버스를 타고 DMZ 내 마을 논길을 견학하는 탐조(探鳥)프로그램이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은 철원 동송읍 이길리 383번지에 있는 이길리(한탄강) 탐조대를 찾아가면 예약하지 않고도 두루미 떼를 볼 수 있다. 전면이 뚫린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면 강변 모래톱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두루미들 광경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VIP 전용석에 앉아 축구 월드컵 경기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옆에서 대포처럼 생긴 600mm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연신 셔터를 누르는 김영호 사진작가를 만났다. 김 작가는 “평생 철원의 두루미를 찾아서 사진을 찍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은 전쟁과 갈등으로 시끄러운데 DMZ 새들은 두루미도, 독수리도, 오리도 모두 평화롭게 먹이를 먹고 있다. 이곳에서만큼은 분단도, 전쟁도, 빈부격차도 없다. 연초에 두루미를 보면 행운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십장생 중 하나인 두루미는 보통 80년 넘게 산다. 꼭 2마리씩 다니는 두루미는 부부가 백년해로한다.

두루미는 시베리아 일대가 혹한기에 접어들면 비교적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해 철원평야, 순천만, 천수만 등지에서 겨울을 난다. 3월이 되면 다시 고향인 시베리아로 돌아가 번식한다. 신년 엽서에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겨울이 가기 전에 철원평야에서 두루미를 만나 평화를 느껴보시기를.

글·사진 철원=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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