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 본 옛 터전은 낯설었다. 수십 년 전 이곳 성수동 연무장길에서 개업한 유홍식 구두 명장은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대로 너머로 떠나야 했다. 전민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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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장길 주인은 구두장이였다. 2010년대 초만 해도 대림창고를 중심으로 한 그 길 양편으론 700~800개에 달하는 신발공장과 공방, 제화점 및 제화 부자재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옛날이야기다. 그 서울 성수동의 중심 거리는 이제 화려한 카페와 팝업스토어들이 장악하고 있다. 거기서 밀려난 서울시 구두 명장 1호 유홍식(76)씨가 씁쓸하게 그 거리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56년 구두 인생을 걸어 온 그는 최근 가게를 성수역 북쪽의 다소 외진 곳으로 옮겼다. 벌써 몇 번째 이사인지 모른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임대료 때문이다. 화제가 팝업스토어에 이르자 유씨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 팝업이라는 것은 하는 사람이나, 세를 준 사람이나 다 도둑이야. 큰 회사에서 한 보름 쓰고 몇억 내놓는 거 일도 아니게 알더라고. 그러니까 집주인들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오게 되고 임대료가 끝 간 데 없이 오른 거지.” 그렇게 팝업의 성지 성수동 연무장길은 화려한 외양 아래에서 원한을 쌓아 가고 있었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실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웅덩이도 있다. 이제는 한계 상황이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워진 자영업자 이야기다. 그 지하실 속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영업자들을 정권과 정부는 몽둥이로 두들기기까지 했다. 비상계엄이라는 엄청난 사태의 뒤안길에서 소비심리는 추락했고, 자영업자의 삶은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했다.
유홍식 구두 명장이 최근 높은 임대료에 밀려 이사한 새 공방에서 수제화를 만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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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료에 짓눌려…17년 음식장사, 무일푼으로 쫓겨났다
지난달 12일 찾은 연무장길에서 신발가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두세 곳 정도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벌이가 뻔한 대부분의 제화업자에게는 너무도 비싸진 그 거리에서 가게를 유지할 여력이 없다. 능력이 있어도 공간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팝업스토어 입점만 기다리면서 멀쩡한 공간을 비워두는 건물주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공급 부족→임대료 상승→둥지 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연무장길에서 밀려난 영세 자영업자들은 ‘성수동구길’이나 성수역 북쪽에 마지노선을 긋고 버티다가 그마저 사수하는 데 실패하면 경기도 외곽으로 튕겨난다.
김영옥 기자 |
그렇게 성수동 사수에 실패한 이 중 한 명이 김정자(70·여·가명)씨다. 그는 최근 17년 음식장사를 빈손으로 마무리했다. 권리금 한 푼 받지 못했다. 상인들이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발가벗겨져서 쫓겨난 것이다. ‘코로나19’의 직격탄으로 빈사상태에 몰렸던 그는 건물주의 ‘임대료 5% 인상’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미 두 차례 5%씩 인상해 주면서 660만원까지 치솟은 월세였다.
그렇다고 그냥 나갈 수는 없었다. 권리금을 한 푼이라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6년 전 아픈 경험을 했다. 11년 동안 장사를 하면서 토대를 튼튼하게 다졌던 원래 가게 자리에서 무일푼으로 쫓겨났다.
김영옥 기자 |
김씨는 모진 마음을 먹었다. ‘진상’ 소리를 들어가면서 무대응으로 1년을 버텼다. 또다시 발가벗겨져서 쫓겨나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건물주가 부동산 중개업소에 내놓으면서 내건 임대료는 월 900만원. 후임자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김씨는 원상회복까지 해 준 뒤 간판을 내려야 했다.
“건물주와 임차인이 서로 상생해야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현행법은 건물주만 살리는 법이에요. 건물주가 칼자루를 쥐고 우리는 칼날을 잡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어요.”
김씨의 마지막 토로가 살아남지 못한 자영업자들의 심사를 대변했다.
◆특별취재팀=박진석·조현숙·하준호·전민구 기자, 사진 전민규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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