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석준 RPA 건축연구소 소장 |
현대 메타버스의 시작을 연 것은 2003년도에 탄생한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라고 할 수 있다. 세컨드라이프는 린든 랩(Linden Lab)이 개발한 인터넷 기반의 3차원 가상 세계 게임 플랫폼이다.
세컨드라이프의 이용자는 자신을 대리하는 아바타를 만들어 다른 아바타와 소통하면서 취미, 게임, 경제활동 등 다양한 상호작용을 한다.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회사를 차리거나 장사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 부동산을 거래할 수도 있다.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엄청난 시도였다. 가상공간에서 승부를 가리는 롤플레잉 게임(RPG)이나 소통과 네트워킹에 중점을 두던 여느 플랫폼과 달리 세컨드라이프는 이미 인간의 삶을 구현하는 미래 메타버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덕분에 IBM, BMW, 삼성전자, 아마존, 도요타자동차, 로이터통신 등 유수의 글로벌 기업이 앞다투어 세컨드라이프로 입성했다.
세컨드라이프 앱 |
화려했던 과거와 달리 현재 세컨드라이프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2000년대 중후반 들어 이용자가 점점 떠나가고 기업도 철수하면서 세컨드라이프는 결국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수천만 명의 이용자를 확보한 현대의 인기 메타버스 플랫폼과 비교할 때 세컨드라이프의 이용자는 10분의 1 수준인 400만∼500만 명 정도였다. 높은 사양의 컴퓨터가 필요했고, 아바타의 조작도 쉽지 않은 데다 플랫폼이 제공하는 여러 기능을 활용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었다.
이런 이유로 메타버스의 주된 이용자인 10대와 20대가 진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기술적 한계도 세컨드라이프 성장에 걸림돌이 됐다. 당시 3G나 LTE 네트워크 환경에서는 세컨드라이프가 제공하는 방대한 3D 그래픽 데이터를 처리하기가 벅찼다.
이용자가 주로 미국에 국한돼 있다는 점도 세컨드라이프가 글로벌 경쟁에서 실패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세컨드라이프는 여러 실패 요인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사람들에게 잊힌 존재가 됐다. 그러나 디지털 메타버스의 시작을 열어준 훌륭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크게 평가된다.
특히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생생한 아바타, 가상공간의 다양한 활동, 플랫폼 전용 가상 화폐를 통한 경제활동까지 오늘날의 메타버스 기업에 하나의 길잡이가 돼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혁신적인 아바타 모델 제시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경험을 가상 세계에서 생생하게 구현하려면 메타버스 내에서 '나'의 역할을 대리하는 아바타가 필요하다. 과거에는 아바타가 단지 흥미의 요소로서 가상의 세계에 존재했다면, 현재의 아바타는 인간의 오감을 실제와 같이 구현하는 것은 물론이다.
인간처럼 서로 어울리며 커뮤니티를 이루고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현실에서와 같은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컨드라이프에서 등장하는 아바타는 이러한 현대적 관점의 아바타 기능을 거의 완벽하게 수행한다. 아바타는 단순한 가상 캐릭터가 아닌 나를 대리하는 존재다. 세컨드라이프라는 가상의 게임 속에서 아바타는 나를 대신해 능력을 발휘하고 매력을 보여주는 제2의 나가 된다.
그래서 아바타의 외형을 어떻게 디자인하는가도 참여자에게는 흥미롭고 중요한 일이다.
세컨드라이프에서 참여자는 나와 꼭 닮은 아바타를 만들 수도 있고,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피부색이나 머리카락 색, 나이나 체형 등이 완전히 다른 아바타를 만들 수도 있다.
심지어 동물도 될 수 있고 동물과 인간이 융합한 형태도 될 수 있다. 현존하지 않는 가상적 존재의 모습으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래픽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다면 플랫폼에서 만든 아바타의 외모를 변형해, 비슷하지만 다른 나만의 차별화된 아바타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취향대로 창조된 아바타는 세컨드라이프에서 평소 내가 원하고 상상하던 다양한 활동을 하고, 현실과는 다른 가상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설계한다. 디지털 가상공간 속에서 친구나 연인을 만날 수도 있고, 상품이나 부동산을 거래할 수도 있다.
평소 바라던 오지 탐험을 하고 현실의 몸치 신세에서 벗어나 최고의 댄서가 되기도 한다. 말 그대로 가상 세계 안에서 제2의 인생, 세컨드라이프를 살아가는 것이다.
더욱 매력적인 점은 세컨드라이프에서 사용하는 화폐 '린든 달러'(Linden Dollars)를 현실 세계의 화폐로 교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상 세계에서 경제활동을 통해 돈을 벌면 현실 세계의 자산도 함께 증식되는 구조이니,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진정한 의미의 메타버스다.
◇ 게임이 아닌 '라이프'
세컨드라이프가 현대 메타버스의 시작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소통의 플랫폼이 아닌,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상의 세계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는 아바타를 통해 가상의 경제·사회·문화생활이 모두 가능하다.
세컨드라이프에서 나의 아바타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술한 바와 같이 대표적으로 여행, 쇼핑, 롤플레잉, 경제활동, 취직, 부동산 거래 등이 있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명소나 휴양지부터 여러 행성이 있는 광활한 우주, 깊은 바닷속은 물론이고 지옥이나 천국과 같은 상상의 세계도 여행할 수 있다.
또한, 땅을 제외한 의상, 가구, 액세서리, 아바타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객체를 참여자가 직접 만들 수 있고, 그중 퀄리티가 뛰어난 것은 공식 장터에 내놓아 거래를 통해 돈도 벌 수도 있다.
쇼핑 역시 대단히 색다르다. 현실 세계처럼 돈을 주고 다양한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다. 플랫폼에서 통용되는 화폐인 린든 달러를 현실의 돈을 주고 환전해 사도 되고, 세컨드라이프에서 직접 돈을 벌어 구매해도 된다. 돈만 주면 아바타도 새롭게 구매할 수 있어 다양한 삶을 살아볼 수 있다.
롤플레잉 기능은 원조 메타버스답게 특별하다. 말 그대로 역할극을 하며 놀이를 즐겨도 된다. 사냥꾼이 돼 원시시대의 초원에서 맹수 사냥을 즐겨도 되고, 무림 고수로서 도전자를 물리칠 수 있다. 또한, 슈퍼 경찰관이 돼 도시의 범죄자를 소탕해도 된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기능은 기업을 설립하고 자신만의 아이템을 개발해 판매할 수 있는 기능이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벌 수도 있다.
경제가 돌아가려면 취·창업은 필수다. 플랫폼 내의 기업에 취직해 월급을 받아도 된다. 참여자들의 상당수가 취업보다는 1인 기업을 창업해 돈을 버는 것을 선호하지만 여전히 취직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
세컨드라이프에서는 전용 화폐인 린든 달러를 내면 누구나 땅을 소유할 수 있다. 플랫폼 속의 수많은 땅에는 검색량, 참여자 수, 참여 시간 등에 따른 '통행량'이라고 불리는 활성화 지수가 있다. 통행량이 낮은 땅을 싼값에 매입해 활성화한 후에 비싼 가격으로 되팔 수도 있고, 건물을 지어 임대할 수도 있다.
◇ 세컨드라이프의 모티브, 버닝 맨
린든 랩의 CEO 필립 로즈데일은 '버닝 맨'(Burning Man)이라는 미국의 이상적 공동체 행사에서 영감을 받아 가상 세계인 세컨드라이프를 디자인하게 된다. '버닝 맨'은 미국 네바다주의 블랙록사막에서 매년 8월의 마지막 주에 시작해 대략 일주일 정도만 개최되는 국제적 규모의 축제다.
1986년 예술가 래리 하비가 샌프란시스코 해변에서 친구들과 함께 2.4m의 나무 인간을 불태운 퍼포먼스에서 비롯된 이 행사는 이후 사회, 예술, 문화가 어우러진 융합적 형태로 발전했다. 매년 세계 각지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이 행사에 참여하는데, 그중에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는 물론이고 구도자, IT 기업의 CEO도 있다.
버닝맨 페스티벌 |
참가자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공동으로 생활하며 디자인, 건축, 음악, 예술, 춤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자유롭게 작품을 만든다.
전시와 공연을 통해 다른 참가자와 작품을 공유하며 즐긴다. 이 행사를 위해 블랙록사막에는 반경 8㎞가 넘는 거대도시가 만들어지는데, 행사의 종료와 함께 도시는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진다.
필립 로즈데일은 버닝맨 페스티벌의 취지와 의미를 디지털 가상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세컨드라이프를 개발했다. 디지털로 구현된 가상 세계에서만이라도 사람들이 각자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며 차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유토피아를 꿈꾼 것이다.
1516년 토머스 모어가 주창한 유토피아를 그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미래 메타버스가 추구하는 세계 또한 버닝맨 페스티벌의 취지와 의미, 세컨드라이프가 꿈꿨던 새로운 제2의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자의 취향과 가치관이 존중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다양한 도전과 창조를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 바로 메타버스다.
무엇보다 현실 세계와 연계되면서 단순한 놀이나 즐거움이 아닌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시너지를 일으키는, 현실과도 같은 가상의 세계가 바로 메타버스다.
노석준 RPA 건축연구소 소장
▲메타버스 및 가상현실 전문가 ▲ 미국 컬럼비아대ㆍ오하이오주립대ㆍ뉴욕 파슨스 건축학교 초빙교수 역임 ▲ 고려대 겸임교수 역임 ▲ 현대자동차그룹 서산 모빌리티 도시개발 도시 컨설팅 및 기획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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