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격 '오페라 프리마' 부문, 한국인 최초 대상
그림책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으로 볼로냐 라가치상의 '오페라 프리마'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대상을 받은 가희(왼쪽) 작가와 진주 작가가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책을 들고 마주보고 있다. 류기찬 인턴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신인 작가가 만든 실험적인 사진 그림책을 어느 출판사가 출간해줄까."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기반으로 한 그림책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의 사진·그림을 맡은 이가희(36·필명 가희) 작가와 글을 쓴 진주(46) 작가는 출판사를 찾다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 둘은 2023년 그림책협회가 출판사와 신인작가들을 짝지어 주는 '그림책 더미데이'에 이 책의 견본(더미북)을 선보였다. "'도전해 봤자 안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더미데이에 갔는데, 운명처럼 핑거를 만난 거예요."(진 작가) 강원 춘천에서 그림책전문출판사 '핑거'를 운영하며 직접 그림책을 짓는 조미자 대표가 책의 진가를 알아봤다. 지난해 9월 출간된 책은 지난달 아동문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볼로냐 라가치상의 '오페라 프리마' 부문 대상을 탔다. 신인상 격인 이 부문에서 국내 작가가 우수상을 받은 적은 몇 차례 있지만 대상 수상은 처음이다.
"사랑스러운 피사체 두 아이 모습 담은 첫 그림책"
두 작가를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그림책에 처음 도전한 이 작가와 앞서 그림책 2권을 쓴 진 작가는 "서로 존중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 (함께하는 작업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한 사람이 쓰고 그린 책 같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호흡을 자랑한 둘은 인천 송도 한 동네에 사는 이웃이다.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의 한 장면. 핑거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책은 진 작가의 이야기 씨앗에서부터 비롯했다. "철거를 앞둔 마을의 초등학교 아이들, 교사들과 함께 마을을 기억하는 그림책을 만드는 활동을 하던 중에 빨간 사과 이야기를 품게 됐어요. 사라져가는 시골 풍경도 사진으로 담으면 좋겠다 싶었죠." 책은 오래된 장판과 자개장, 시골의 버스 정류장 등 한국적 풍경 안에서 사과 한 알이 맺히길 기다리면서 성장하는 형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진 작가는 2022년 겨울, 완성한 글을 들고 이 작가에게 사진 작업을 제안했다. 평소 이 작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찍어 올리는 사진 속 두 아이 지구(8)·지호(7) 형제가 글의 주인공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현재 프리랜서 공간디자이너로 일하는 이 작가는 흔쾌히 응했다. "다양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손에 가지고 있었던 게 카메라였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은 아이들이거든요."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의 한 장면. 핑거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변을 살피는 이들이 좋은 열매를 맺길"
책을 펼치면 한눈에 특별함을 알아챌 수 있다. 이 작가가 가장 사랑하는 피사체를 필름 카메라로 포착한 따뜻한 질감의 사진이 장을 넘길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다. 2023년과 이듬해 여름 이뤄진 촬영은 배우와 스태프, 장소 섭외까지 모두 작가들이 직접 했다. 촬영 현장은 주로 이 작가의 외갓집인 경남 사천 단감마을. 주인공인 두 아이는 물론 이 작가의 조부모와 남편까지 총동원했다.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마스킹 테이프를 잘라 붙여 쓴 것 같은 글씨체도 감각적이다. "사진은 신선하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사진 자체의 회화성은 최대한 살리려 했다"는 게 이 작가의 설명. 진 작가는 "사진 덕분에 독자가 더 풍성하게 이야기에 몰입하고 긴장하는 효과를 냈다"고 했다.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진주 글·가희 사진그림·핑거 발행·72쪽·1만8,000원 |
"지구처럼 자신보다도 주변을 더 살피는 이들이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가)을 책에 담았다는 두 작가는 지구의 빨간 사과에 이어 지호의 블루베리에 관한 후속작을 준비 중이다.
'내가 과연 작가일까, 작가를 해도 될까' 흔들리던 진 작가는 이번 수상으로 다음을 기약할 힘을 얻었다고. "'그래, 조금 더 해라'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 그게 가장 큰 기쁨이에요. 이 상은 저희처럼 매일 불안과 두려움에 맞서 책상에 앉은 수많은 신인 작가와 함께 받은 상입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