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 따스한 세상을 꿈꾸며
다양한 감정과 욕망 담아 일컫는 ‘사랑’
명확히 인식하려는 시도 찾기 어려워
사랑을 다른 차원의 것으로 여기지만
삶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라면 어떨까
여러 작품에 수많은 얼굴의 사랑 존재
‘진정한 사랑’의 미술 이야기 전하고파
아무리 세상이 차갑게 얼어붙어도, 사랑으로 삶이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봄의 기운이 잠에서 깨어나 온화한 공기가 세상에 스며들기 시작할 때, 우리 마음속에도 사랑의 물결이 잔잔히 퍼진다. 사랑하는 존재-그것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반려동물이나 식물이든- 그들의 숨결과 눈동자에서 우리는 사랑을 발견한다. 이렇게 반짝이는 순간들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 삶의 신비를 엿보게 한다. 무료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찾아오는 사랑의 순간은 시공간의 법칙을 초월하여 불꽃처럼 솟아오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 혹은 수평적 시간이라 불렀다. 이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신성한 순간이나 깨달음을 경험하게 하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 또는 수직적 시간이라 불렀다. 우리가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은 이성적 사고를 초월하여 신비한 체험과 직관을 통해 영적인 차원에 맞닿게 되는,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르네 당주, ‘Le mortifiement de vaine plaisance(헛된 쾌락의 극복)’(1455) |
◆사랑에 대하여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을 정의하고, 가설을 세우며,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를 분주하게 만들어왔다. 사랑이 아우르는 거대한 영역 안에서 웃고, 슬퍼하며 환희했다. 하지만 골목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울려 퍼지고 넘쳐나는 것에 비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묻고 그것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려는 시도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동시대 유행가에서 흔히 등장하는 감정적 애착으로서의 사랑과 1960년대 ‘사랑의 여름’에서 히피들이 외쳤던 사랑이 다르다는 점만 보아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모양의 감정과 욕망을 가장 친숙하고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설명 불가능한 인간의 감정이라는 변명 아래, 그 의미를 깊이 탐구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감정들을 사랑 안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랑이라 불리는 이러한 감정들은 사실상 집착의 또 다른 이름이거나 자신의 에고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누군가를 소유하려 하거나 자신이 설정해 놓은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면 실망과 분노로 변질되는 감정들이 그러하다. 사랑에 이렇게 조건이 붙는 순간, 그것은 필연적으로 한시적이며 영원할 수 없게 된다.
많은 이가 사랑을 책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쯤으로 여기거나 우리와는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화되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우리가 하는 사랑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인(聖人)들이 설파한 사랑이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소란스러운 바깥세상으로 향한 마음의 스위치를 끄고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본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보려 하는 만큼 열리고 확장된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VII’(1913) |
◆미술 속 사랑
미술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너무나 방대하여 그것을 범주화하기 어려울 정도다. 신에 대한 숭고한 사랑, 남녀 간의 에로스적 사랑, 조국과 고향에 대한 사랑, 나르시시즘적 사랑까지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미술사의 전개와 늘 함께해 왔다. 하지만 사랑을 주제로 한 모든 작품이 우리에게 ‘수직적 시간’을 경험하게 하지는 않는다.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자신의 저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예술가는 “인간의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는 목적에 적합하도록 이렇게, 저렇게 건반을 두드리는 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형식에만 치우친 예술의 무력함을, 수천 개의 캔버스로 가득 찬 방에서 관객이 무의미하게 책장을 넘기듯 제목을 읽으며 지나치는 모습으로 비유했다. 그는 예술이 삶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풍부해진 것도, 빈약해진 것도 아닌 채로 떠나버린 그들은 다시 예술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일상생활에 파묻혀버린다”고 지적했다.
미술의 대중화가 오랫동안 곳곳에서 논의되어 왔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미술을 어렵게 느끼고, 먹고살기 힘든 현실 속에서 미술의 가치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연의 힘을 잃은 미술이 인간의 영혼을 울리고 삶을 환기하는 역할을 상실한 채, 단순히 지식으로 전달되거나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순간적인 즐거움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나 상업적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힐마 아프 클린트, ‘Group IX/UW, The Dove, No.1(그룹 IX/UW, 비둘기 1번)’(1915) |
◆사랑으로 물든 미술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곁에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전달하는 미술가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목표를 두지 않고, 비가시적인 사랑의 본질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 소외된 자들과 버려진 동물에 대한 사랑, 세상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자연에 대한 찬미, 어둠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삶에 대한 애정 등 수많은 얼굴의 사랑이 이들의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쉰다. 사랑에 대한 이들의 확고한 신념은 사고의 폭을 넓히고 영혼을 울리며, 나아가 세상을 밝힌다.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상드(1804∼1876)는 “예술가의 소명은 인간의 마음에 빛을 비추는 것”이라고 했다. 예술이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 내면을 울리고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지닌다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미술이 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느 때보다 영혼을 밝히는 등불이 간절한 이 시기에 “인간의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는” 미술을 만나고 그것이 삶에 스며든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상상한다.
찰나의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우리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고 삶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사랑’을 담은 미술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형식과 매체, 국경과 젠더에 대한 고정된 틀이 붕괴되며 모든 것이 가능해진, 동시에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동시대 미술계에서 원점으로 돌아가, 흔히 말하는 ‘예술의 영향력’과 그것이 지닌 ‘힘’을 탐구할 것이다. 사랑이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는 방식이자 관계 맺는 태도이고, 미술이 그 사랑을 체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면, 미술은 우리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힘, 어둠을 물리치는 빛, 다시 말해 사랑으로서의 미술. 미술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또 다른 언어가 되기를 기대하며, 따스한 사랑의 온기로 물든 세상을 꿈꾼다.
신리사·전시기획자, 학고재 기획팀장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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