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지금을 살아가는 세상의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영화를 보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요즘이 바로 그런 때다. 어지러운 사건과 사고에서도, 인공지능(AI)이 발전을 거듭하며 영상 이미지에서 음성과 감정 표현, 운동성과 물리 법칙을 실제 우리가 영화라고 인지하는 감각에 가깝게 구현할 수 있다는 소식에서도 완전히 동떨어진 영화 말이다. 올해 1월에 다시 개봉한 1991년 작 ‘퐁네프의 연인들’은 2026년의 현실과 영화 사이에 어떤 영향도 주고받을 일이 없기를 바라는 관객의 필요에 들어맞는 영화 같았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를 잇는 레오 카락스의 청춘 3부작이다. 쥘리에트 비노슈는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 미셸을, 드니 라방은 밤이 되면 불 쇼를 선보이며 거리에서 연명하는 알렉스를 연기한다.
오래전에 본 이 영화에서 뇌리에 깊이 각인된 것은 드니 라방의 신체 움직임이다. 불면의 밤에 알렉스가 파리의 거리를 걷는 영화의 첫 장면은 고통 그 자체였다. 내면의 고통을 육신의 차원으로 표현하는 드니 라방의 방식은 잘 훈련된 배우라기보다 현대 무용수에 가까웠다(고 기억한다). 두 움직임의 차이는 퐁네프 다리에서의 불꽃놀이 시퀀스에서 드러난다. 제각각의 음악이 이어 흐르는 동안 쥘리에트 비노슈는 훈련된 배우의 움직임으로 춤추고 드니 라방은 유랑단에 소속된 무용수처럼 몸을 흔든다. ‘퐁네프의 연인들’이 현재의 무엇도 역으로 비추지 못할 것이란 기대와 예상은 완전한 착오였다. 지난날의 쥘리에트 비노슈와 드니 라방의 얼굴을 보는 매분 매초 한 작품을 관통하는 인물의 일관성과 인간 감정의 복잡함이 가진 비일관성, 비논리성은 명령 프롬프트와 기계 학습의 결과물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절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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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연기와 운동의 영역을 실제처럼 구현했다는 사실은 미래의 위기처럼 다가와 현재를 괴롭히지만 고백하자면 영화와 문학의 영역에서 AI의 기술적 발전이 여전히 조금도 두렵지 않다. 구현과 표현은 명백히 다르다. 알렉스가 미셸을 바라보는 무언의 표정은 언어로 채 정리되지 못한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자학과 파괴로 이어지는 불가해한 감정을 묻어두고 있다. 쥘리에트 비노슈가 연기하는 미셸 또한 비록 그것이 타인에 의해 잘못 관찰된 성질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가진 고유성과 의외성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명령에 따라 휘갈겨 쓰고 난 뒤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AI의 문학성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듯 카메라 앞에서 어떤 역사도 등에 지우지 않고 구현된 기술과 기교는 단 한 명의 관객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의 정의는 밤하늘에 번쩍이는 불꽃놀이를 구현해 낸 화려한 미장센에만 있지 않다. 세상의 어느 귀퉁이를 어떻게 비추어 보여줄지에 대한 경험과 상상, 사유와 선택의 결과다. 이것은 삶을 살아낸 자의 영역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유선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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