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전쟁과 그 상처를 형상화한 모나 하툼의 설치 작품 '미스바'. 화이트큐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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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방에 들어가니 샹들리에처럼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시시각각 돌아가며 눈을 부시게 한다. 벽면에 비친 형상은 다름 아닌 전진하는 무장 군사들. 조명이 도는 동안 벽면의 군사들도 관객을 둘러싼 채 계속해서 전진하고, 주변에 흩어진 불빛들은 포탄의 화염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는 전쟁과 그 상처를 형상화한 레바논 출신 작가 모나 하툼의 설치 작품 '미스바(Misbah)'(2006~2007)다. 미스바는 아랍어로 '불을 밝히는 등'이란 의미다. 약 20년 전 제작된 작품이지만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을 예견한 듯하다.
하툼의 한국 첫 개인전이 서울 강남구 청담동 화이트큐브에서 오는 4월 12일까지 개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드로잉, 회화, 조각,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관습과 통념을 깨고 참여적인 목소리를 내온 작가의 시기별 주요 작품 2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작은 1990년대의 비교적 초기 작품부터 올해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하툼은 "한국에 와서 세 곳의 미술관을 방문했는데 1분, 1분이 너무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하툼의 작업은 익숙한 사물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만드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매료되면서도 두려운 것처럼 양가의 모순된 감정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일례로 전시작 '무제(휠체어Ⅱ)'(1999)는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환자를 모티브로 이중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휠체어를 변형한 것으로, 평범한 휠체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위태롭게 앞으로 기울어진 모습이고 손잡이 부분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돋아 있다.
이와 관련해 하툼은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오는 자괴감을 느끼면서 돌보는 이에 대해 고마움보다는 오히려 반감을 느끼는 그런 상황을 떠올렸다"며 "손잡이 부분의 칼날도 보호와 위협이 공존하는 긴장감을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공개된 신작 '분리'(2025)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칸막이 형태를 하고 있지만, 가림막에 쓰이는 부드러운 패브릭 대신 날을 세운 금속 철조망이 면을 채우고 있다. 공간을 구획하고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 사물이 차단과 경계의 역할을 하도록 의미를 전복시킨 것이다. 하툼은 "철조망은 기본적으로 국경이나 군사 분쟁 지역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칸막이에 무심코 다가갔다가 관객은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신작인 '정물(의약품 캐비닛)Ⅳ'(2025)도 같은 맥락에서 계속되는 전쟁의 상흔을 보여준다. 의약품 캐비닛 구조에 다소 이질적인 수류탄 형태의 유리 조각들을 진열한 작품으로, 치유와 파괴, 보호와 위협이라는 모순된 요소를 한데 엮은 대비로 전쟁의 비극을 극대화한 것이다. 제목은 '거울'(2025)이지만 거울의 반사면이 없고, 철근으로 만들어진 구조물만 벽에 걸린 작품도 있다. 하툼은 "통제되고 감옥에 갇힌 지금의 우리 상태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오늘날처럼 굉장히 첨예하게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이 있고, 굉장히 억압적인 정권들이 분열을 조장하는 시대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한편 전시장에서는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리카락을 모아 작품화한 '헤어 네크리스' 연작의 근작도 만나볼 수 있다. 1995년 프랑스 보르도의 까르띠에 매장 쇼윈도를 장식한 바 있는 이 시리즈는 30여 년이 지나 은빛으로 재해석됐다. '헤어 네크리스(실버)'(2025)는 귀금속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통해 머리카락이라는 신체의 일부를 고급 주얼리로 승화한 작품이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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