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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의리 있는 여자 [인문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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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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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모두 남편을 잃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 남편을 만나라고 했다. 자기도 고향으로 갈 터이니 이제는 헤어지자는 것이다. 그런데 며느리가 막무가내다.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지 마세요. 저는 어머니 가시는 곳으로 가고, 어머니 묵으시는 곳에서 묵을 테니까요. 어머니의 백성이 저의 백성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에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거기에 묻히게 해 주세요.”(룻기 1:16-17, 새한글성경).

믿기 어려운 며느리다. 시어머니를 죽기까지 따라가겠다고 하니 심지어 섬뜩하다. ‘룻이 과대 의존증이 있을 것’이라는 학자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사실 둘은 참 좋은 사람이다. 나오미는 며느리들로부터 존경받는 시어머니였고, 룻은 집안의 병든 남자들을 군말 없이 돌보던 착한 며느리였다.

그런데 기원전 12세기 가량의 중동에서 여자가 아버지나 남편, 혹은 아들 없이 혼자 남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시어머니가 홀로 길을 떠나는 것을 룻이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 국적과 종교마저도 어머니와 함께하겠다고 하니, 홀로된 나오미에게는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룻기는 놀라운 신학을 말한다.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행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두 여인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뿐이다. 물이 갈라지고 해가 멈추는 성경의 다른 이야기들은 되려 우리의 일상과 거리가 멀다. 룻과 나오미처럼 믿음만을 가지고 분투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에는 더 가깝다. 서로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극복하기 위해 끈끈한 ‘의리’를 보여준 두 여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움 가운데 훈훈한 결말을 맞는다. 만약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성경에 나온다면 룻기가 적절해 보인다. 서로 신의를 저버리지 않자, 하나님도 신의로 응답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잘해야 하나님의 축복도 누린다는 신앙적 교훈을 남긴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여자였다. 그의 자식이 나중에 이스라엘 최고 영웅이 된 다윗의 할아버지가 된다. 외국인을 차별했던 당시 엘리트 유대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다. 심지어 이 가문에서 예수도 탄생했다. 남자만 즐비한 족보지만, 예수의 족보에는 여자 룻이 등장한다. 여성을 멸시하던 당시 가부장적 남자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다. 사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인종이나 국적, 성별로 인해 사람의 가치가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 간의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좋은 사람’이면 누구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한국일보

기민석 목사·한국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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