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일본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담에서 만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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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28일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정확히 한달 전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에 세르비아 지하조직이 연루된 데 대한 응징이었다. 분쟁이 여기서 멈췄다면 역사책에는 제3차 발칸전쟁 정도로 기록될 수도 있었다. 실제 암살 사건 초반에만 해도 영국은 약소국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데 유보적이었다. 영국 외상 에드워드 그레이는 세르비아의 주권보다 유럽의 평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무릇 작은 나라는 양보해야 한다’라는 영국 외교의 일반적 관점이기도 했다. 소국이 굴욕을 견디면 세계 평화는 유지될 수 있다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결국 영국은 프랑스·러시아와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독일 동맹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는 영국이 사태를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고, 오스트리아도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독일의 유럽 장악을 저지하는 것이 중요했고, 이 점에서 영국의 국익이 프랑스·러시아와 묶여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45년 2월 2차 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얄타 회담도 강대국의 지정학적 사고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소련·영국의 지도자들은 각자의 세력권 구축을 통해 전후 유럽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더러운’ 타협을 한 바 있다. 루스벨트와 처칠이 배타적인 세력권을 요구하는 스탈린에게 양보하여 동유럽을 소련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얄타의 불명예는 소련과의 새로운 전쟁을 막았고 30년 동안 유럽의 안정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유럽의 절반이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반세기 동안 동유럽은 공산주의 독재에 신음하는 결과가 초래된 것도 사실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대한 법적·도덕적 의무를 배신한 것이며, 안정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강대국 외교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처칠 총리는 1944년 10월 스탈린과의 모스크바 회담에서 악명 높은 ‘퍼센트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소련과 영국이 동유럽 국가들에서 나눠 가질 영향력을 숫자로 논의했는데 루마니아는 9 대 1, 헝가리는 5 대 5, 그리스는 1 대 9라는 식이었다. 영국의 관심사인 지중해와 인도양 보호를 위해 발칸 지역에서 러시아에 양보할 지분을 흥정했던 것이다.
2025년 2월부터 급물살을 타고 있는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가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전쟁의 당사자이자 깊은 이해관계자인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한 채 러시아와 담판 형식으로 종전을 밀어붙이고 있다. 종전 협상의 틀도 기존 서방의 정책 기조와는 크게 다르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과 전쟁 이후 상실된 우크라이나 영토 회복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사실상 러시아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는 모양새다.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어온 자유주의 패권 외교의 종말을 상징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 나토 확대와 같은 자유주의 확장 프로젝트에는 관심이 없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세력권임을 깨끗이 인정하며 손을 털고 있다. 대신 그린란드 매입, 파나마운하 통제권 등 미국의 이권을 주장하는 데 거침이 없다. 실로 강대국들이 노골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국익을 거침없이 추구하며 타협과 거래가 병행되는 강대국 세력균형 질서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2차 대전 이후 80년은 긴 역사의 예외적 시기이며, 현재는 국제 정치가 본래의 민낯을 드러내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국제 질서의 대전환은 한국 외교에도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가치외교니,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대결이니 하는 사고에 갇힐 때가 아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이런 구호는 서방의 지정학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동원된 수사에 불과했다. 우아한 위선의 시대는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는 표현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혼돈의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강대국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규범적 사고를 넘어 국제 정치가 얼마나 위험한 게임인지 이해하는 게 출발이다. 특히 지정학적 단층선에 위치한 한국으로서 이는 사활적인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단아일지 몰라도 그가 일깨우는 국제 정치적 교훈은 단순한 파격이나 일탈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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