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의의 가장자리 톡]
AI 이미지 생성 DALL.E 캡처 |
봄볕이 화사하다. 이 봄에 친구가 백내장 수술을 했다. 며칠 전 정오 무렵, 쏟아지는 봄볕을 맞으며 우리는 산나물 반찬에 청국장으로 밥을 먹었다.
"수술하고 눈을 떠보니 세상이 바뀌었더라고. 와! 얼마나 깨끗한지… 거울 앞에 섰는데, 왠 노인네가 있는 거야. 가만 들여다보니 내 얼굴이더라고. 주름도 없고 검버섯도 없이 젊어 보였는데… 눈이 밝아지니까. 세상에! 이마와 눈가로 주름이 쪼글쪼글하고 눈 밑은 시커멓고…"
백내장 수술을 하고 나서 눈이 밝아졌다는 친구의 자랑이다. 그런데 세상 만물이 잘 보이는 것은 좋은데, 그동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니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우리는 번잡한 식당을 나와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다. 화병에 꽂혀 있는 연보라색 튤립이 탐스럽다. 튤립의 꽃말이 사랑의 고백이라고 친구가 알려준다. 아홉 송이의 튤립이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들 같다. 친구가 커피를 마시다가 올해 구순인 엄마 얘기를 꺼낸다. 백내장 수술을 하고 나서부터 자꾸만 엄마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엄마!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해요! 국그릇에 묻은 고춧가루 좀 봐! 접시 좀 봐. 기름이 덜 닦였잖아? 엄마. 이런 거 안 보여? 엄마. 노망 들었어? 치매가 왔어?"
"아니 뭐가 더럽다고 그러냐. 깨끗하잖아. 뭐가 덜 닦여? 내 눈에는 깨끗하구만!"
엄마의 지저분한 설거지는 그 후에도 바뀌지 않았단다. 식기 건조대에 진열된 접시와 밥그릇, 국그릇, 머그잔… 빗방울처럼 묻어 있는 흔적들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고 했다.
"늙으면 그리되나 보다 하고 포기했지."
조중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런데 백내장 수술하고 눈이 밝아지니까, 너무 잘 보이니까… 엄마 생각이 나더라고…"
엄마는 평생 눈이 나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단다. 불편해도 나이가 들면 그러려니 하고 살아간 것이다. 이제 와 구십 살 노인네가 백내장 수술을 한들 무슨 호강을 누릴까. 그 연세에 세상이 잘 보인다 한들 뭐가 좋을까.
"나는 가끔 찾아오는 딸에게 잔소리를 들어. 아빠! 세면대 좀 깨끗이 사용하면 안 돼? 왜 이렇게 더러워!"
내 이야기에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니 뭐가 더럽다고 그래? 아빠 눈에는 깨끗하기만 한데…"
"아빠! 아무튼 깨끗이 닦아요. 아빠 눈에만 깨끗하다고 모두에게 깨끗한 거 아니니까. 알았지?"
정말 내 눈에만 깨끗한 건가? 모두에게도 깨끗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걸까? 친구의 백내장 수술이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도 백내장인가?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건가?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라."
내 말에 친구는 고개를 흔든다.
"기억할지나 몰라. 벌써 이십여 년 세월이 흘렀잖아."
그러더니 친구가 안경 너머로 나를 유심히 바라본다. 진지하게, 심각하게 말한다.
"너는 딸에게 얘기해라. 그리고 안과에 가서 진료도 받아보고. 그래야 나중에 딸이 후회하지 않지!"
백내장이라 한들 수술해서 무슨 호강 누리겠다고… 딸에게 자초지종 시력 문제를 설명한들 걱정만 더할 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고… 그럼 그때 깨달아도 되고, 후회해도 되고, 눈물 한 방울 주르륵 쏟아도 되는 거지. 나는 의연하다.
친구의 눈이 밝아진 것을 축하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봄날 오후의 길이 어둡다. 오늘부터는 세면대와 변기를 더 세심히 살펴야겠다. 내 눈에는 안 보이더라도 더 닦고 더 헹궈 내야겠다. 딸 아이가 내 나이쯤 됐을 때 백내장 때문에 세면대가 지저분한 것도 모르고 살았던 아빠 생각에 주르륵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눈치채지 못하도록 깨끗하게! 말끔하게!
잠시 길가 벤치에 앉는다. 산수유가 노란 눈을 뜨고 있다. 동박새 몇 마리가 가지 사이에서 숨바꼭질한다. 저들끼리 주고받는 노래가 작지만 청순하다. 마음을 바꾼다. 내일은 안과를 가야겠다. 주르륵 눈물이라니! 그렇게 할 수는 없지.
※CBS노컷뉴스는 여러분의 제보로 함께 세상을 바꿉니다. 각종 비리와 부당대우, 사건사고와 미담 등 모든 얘깃거리를 알려주세요.
- 이메일 : jebo@cbs.co.kr
- 카카오톡 : @노컷뉴스
- 사이트 : https://url.kr/b71afn
저작권자 © CBS 노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