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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2 (토)

[윤주의 이제는 국가유산] [23] 다산이 거닌 길에 동백꽃 피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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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동백숲./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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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화 맞닿은 잎은 추위에도 무성하고, 눈 속에 피어난 꽃은 학 이마처럼 붉어라.’ 정약용(1762~1836)이 강진에서 3월에 지은 시이다. 그는 동백을 산다(山茶)라 하며 귀한 학으로 비유했다. 1801년 강진 유배지에서 맞은 겨울 근심 풀어 준 것도, 섣달 전에 꽃 피운 동백이라 했다.

동백 숲이 천연기념물인 강진 백련사 동백은 겨울부터 피어나 춘삼월 만개한다. 꽃송이가 작고 붉다. 동백꽃 피는 시절 따라 며칠 전 살펴본 백련사 동백이 눈에 삼삼하다. 꽃은 덜 피었지만, 백련사 앞에서 동백 조화를 화사하게 단 배롱나무가 찾는 이를 반겨주었다. 꽃샘추위라지만 갈수록 꽃의 시간을 짐작하기 어렵다.

동백 숲을 산문처럼 두르고 있는 백련사는 연꽃 같은 봉우리가 아름다운 만덕산(萬德山)에 자리한다. 만덕산 일대에 야생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이라 호를 지은 정약용은 열수, 사암, 여유당 등 여러 호를 지니고도 차향 품은 다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1808년 봄이 되면서 정약용은 백련사 서편에 자리한 윤단의 산정(山亭)으로 거처를 옮긴다. 지금의 다산초당으로 유배 끝날 때인 1818년까지 머물렀다. 그곳에서 지낸 데에는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 가문의 배려가 있었지만, 백련사에 있는 아암 혜장 선사(1772~1811)와 가까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다산은 아암의 초연한 삶을 예찬하며 깊은 정을 나누었다. 나이도 신분도 초월한 그들은 한밤중에라도 찾아올까 싶어 문을 열고 지냈다 한다. 아암이 술병을 얻어 입적하기 전까지 설레며 다닌 길이 지금도 오롯이 남아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는 도보로 40여 분 걸리지만, 그들의 흔적과 수려한 풍경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야 좋다.

봄물 드는 만덕산은 찾는 이에게 만 가지 덕으로 그들이 나눈 풍경을 서서히 풀어내 준다. 오랜 세월 위안과 힘을 건네준 덕인지 최근 ‘강진 만덕산 백련사와 다산초당 일원’이란 이름으로 명승이 되었다. 동백꽃에 더해 백련사 차향이 코끝에서 내내 맴돈다. 냉이밭 나는 흰나비 앞세우고 그들의 마음 따라 백련사 가는 숲길을 다시 걷고 싶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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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자연유산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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