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기획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된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지난해 12월24일 오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부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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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2024년 상반기 진급 심사를 한달 가량 앞둔 시점, 구삼회 당시 육군 2기갑여단장(준장)은 큰 기대 없이 차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50기 동기생 다수가 이미 별 두개를 달고 국방부나 육군본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전 해 3차 소장 진급심사에서도 떨어진 구 전 여단장은 이젠 자기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통상 군에서 3차 진급심사 탈락을 하면 마음을 많이 내려놓고 생활합니다.” 구 전 여단장이 지난해 12월 검찰조사에서 검사에게 한 말이다. 그렇게 낙담한 채 마음을 비우고 있던 때, 생각조차 못 했던 사람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나 노상원이야. 왜 그동안 연락 한번 안 하냐? 의리 없는 놈.”
수개월에 걸친 ‘가스라이팅’ 작업, “하, 큰 형님이 부탁하니까…”
구 전 여단장이 전 정보사령관 노상원씨(육사 41기)와 통화한 건 이날이 2015년 이후 처음이었다. 노씨는 구 전 여단장을 나무라고는 다짜고짜 진급 얘기를 꺼냈다. “의리 없이 전화도 한번 안 하는 놈이지만 존경하는 큰 형님 김근태 사령관님이 부탁했으니까 할 수 없이 도와준다. 잘 들어. 내가 아는 사람들이 많아. 김용현하고도 잘 알아. 네가 왜 진급이 안되는지 알아보고 연락할게.” 김근태 예비역 대장은 2000년대 후반 제1야전군사령관을 지냈다. 구 전 여단장은 그 당시 김 사령관을 통해 노씨를 처음 알게 됐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12·3 비상계엄하에 군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수사하려 했던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비공식 수사조직 ‘제2수사단’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수사단장 자리에는 구 전 여단장, 부단장엔 방정환 당시 국방부 전작권전환TF장(준장)을 임명시키려 했다. 검찰은 그 배후에 실질적으로 2수사단을 지휘하려 했던 노씨가 있다고 본다. 노씨는 문상호 당시 국군정보사령관과 2수사단 간부들을 지난해 12월1일과 3일, 이틀에 걸쳐 경기도 안산 자기 집 근처 햄버거 가게로 불러 지시를 내린 것으로 조사됐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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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정보사 군무원 블랙요원 명단 유출 사건’이 발생한 정보사 100여단 산하 2사업단의 정성욱 단장(대령)도 노씨의 ‘타깃’이 됐다. 정 전 단장은 지난해 8월부터 3개월간 직무분리 명령을 받고 업무에서 배제됐다. 노씨가 정 전 단장에게 처음 접근한 시점이다.
노씨는 마침 공석이던 정보사 100여단장(준장) 자리를 미끼로 던졌다. 군사특기가 ‘인간정보’인 정 전 단장이 오를 수 있는 유일한 장군 자리였다. “전역이 얼마나 남았냐? 진급해야지. 김봉규가 선배니까 먼저 진급하고 다음에 네가 하면 되겠네. 내가 잘 도와줄게. 내가 장관이랑 잘 아는 사이야.” 텔레그램 전화였다. 김봉규 당시 정보사 중앙신문단장(대령)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취지의 전화를 받았다. 김 전 단장은 상급자인 문 전 사령관보다도 육사 기수가 높아 사실상 승진이 어려운 상태였다. 둘은 각각 2수사단 수사3부장과 2부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노씨는 이들에게 100여단장직을 거론하며 2수사단 요원 40명을 직접 선발하도록 했다.
“내가 누구냐. 의리하면 나잖아”…약속한 자리에는 딴 사람이
노씨는 자신의 공작망에 걸려든 군 간부들에게 진급 로비에 쓴다며 돈도 뜯어냈다. 구 전 여단장은 “노씨가 ‘대통령실 공직기강 담당자가 버틴다’며 ‘총대를 메고 구워삶을 테니 5장(500만원)을 준비하라’고 말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구 전 여단장은 “그렇게까지 진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주저했지만, 노씨가 “눈 한번 감고 지나가면 ‘쓰리스타’까지 문제가 없다”고 말하자 거부하지 못했다. 검찰은 비슷한 수법으로 노씨가 김 전 단장에게서도 2000만원을 받아냈다고 본다. 노씨가 이 돈을 실제 진급 로비에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구 전 여단장은 지난해 11월25일, 다섯번째 소장 진급심사에도 떨어졌다. 이번엔 진급심사 직전에 노씨가 먼저 연락해 탈락 사실을 전했다. 노씨는 그러면서 낙담한 구 전 여단장에게 알 수 없는 얘기를 꺼냈다. “장관님이 삼회 너는 귀하게 쓰실 생각이 있다고 하시더라. 조만간 다른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몰라.”
비상계엄 선포 사흘전인 지난해 11월30일, 구 전 여단장은 다시 노씨의 전화를 받았다. “장관님이 조만간 국방부에 파견명령 내서 너를 부르신다고 하더라. 국방부 와서 일하려면 며칠 입을 옷가지도 준비해야겠지. 파견 오면 바로 집에 못 갈 수도 있잖아.” 하루 뒤 노씨에게 걸려온 전화는 좀 더 의미심장했다. “이제 됐어. 3~4일 내에 파견명령을 내서 부르신다고 하셨어. 전화 대기 잘하고. 삼회야,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권도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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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에게 수개월에 걸쳐 ‘가스라이팅’을 당해 온 장군들과 대령들은 지난해 12월3일 오후 5시쯤 경기도 판교 정보사 100여단 본부에 모였다. 구 전 여단장도 이날 오후 안산시 햄버거 가게에서 방 전 TF장과 함께 노씨를 만난 뒤 판교로 이동했다. 이들의 검찰 진술을 종합해보면, 당시 햄버거 가게에서 노씨는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이 구성되는데 구 장군이 단장, 방 장군이 부단장을 맡으면 된다”며 “상황을 종합해서 장관께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판교 정보부대에 가서 명령을 확인한 후 임무를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검찰은 노씨가 진급을 미끼로 군 장성과 대령들을 2수사단 구성에 이용했지만 이들을 실제로 진급시킬 생각은 없었다고 판단한다. 오영대 국방부 인사기획관은 지난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12월2일부로 정보사 100여단장 자리에 정용길 준장이 가기로 돼 있었다”고 진술했다. 오 기획관은 “그런데 11월29일 20시경 김 전 장관이 전화하더니 ‘보직 교체를 12월24일로 연기하라’ 지시했다”고 말했다. 김 전 단장과 정 전 단장 등은 이 사실을 모른 채 100여단장을 꿈꾸며 비상계엄 당일까지도 노씨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구 전 여단장은 정보사 100여단 정 전 단장 사무실에서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것을 지켜봤다. 이후 3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의결했다. 그때까지도 인사명령을 기다리던 구 전 여단장은 노씨에게 전화를 걸어 임무를 물어봤다. 노씨는 “아휴, 이제 됐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구 전 여단장은 이후 몇 번 더 전화를 걸었지만 다시 노씨와 통화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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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준 기자 jchang@kyunghyang.com, 유선희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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