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란 란가나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김영사 | 420쪽 |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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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불가리아 소설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소설 <타임 셸터>에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위해 옛 시대를 완벽히 재현한 클리닉이 등장한다. 환자들은 과거의 기억에 빠져 현실의 고통을 잊는다. 소설의 화자는 말한다. “우리는 시간을 먹고 과거를 생산한다.”
기억은 인간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기억이 우리를 서로 다른 개인으로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한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에 새겨진 것조차 있는 그대로는 아니다. 우리는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 왜 기억에는 왜곡이 존재할까.
캘리포니아 대학교 신경과학 교수 차란 란가나스의 <기억한다는 착각>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잊어버리도록 설계되었다. 망각은 기억의 실패가 아니라 정상적인 뇌 작동의 결과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평균적인 미국인은 하루에 34기가바이트의 정보에 노출된다. 한 달이면 1테라바이트에 해당하는 용량이다. 우리가 찾으려는 기억에 도달하려면 해당 기억이 저장된 뉴런연합에 접근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다른 뉴런연합들이 마구 끼어드는 ‘간섭현상’을 이겨내야 한다. 물건을 놔둔 곳을 잊어버리는 것 같은 일상적 건망증은 비슷비슷한 기억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일화기억은 진화과정에서 인간이 발달시킨 생존 능력과 관계가 있다. 각각의 사건을 시간과 장소별로 색인을 붙여 다르게 저장할 수 있는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처음 만나는 예외 상황에 재빨리 적응할 수 있다. 이와 비교해 인공지능의 기계적 신경망은 규칙에서 벗어나는 예외와 맞닥뜨리면 급격하게 인식 속도가 저하된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의 최신 인공지능도 새로운 일을 해내려면 엄청난 데이터를 통해 학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경험을 묶음으로 저장하는 것은 우리의 뇌가 복잡다단한 세상에 대처하기 위해 발전시킨 방식이다. 학술 용어로 ‘덩어리짓기(chunking)’로 불리는 이 방식은 주민등록번호나 은행 계좌번호를 외울 때처럼 정보를 우리가 외우기 쉬운 단위로 분절해서 처리하는 것이다. 10만개가 넘는 숫자로 이뤄지는 원주율을 외우는 기억 천재들은 뇌의 성능이 좋아서가 아니라 정보를 묶음으로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가 구전될 수 있었던 것도 서사시의 구조와 리듬에 반복적인 패턴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의 기억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도식’을 활용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식은 기본 구조가 같은 ‘청사진’을 사용해 대규모 주택을 건설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청사진을 재사용해서 새로운 건물을 효율적으로 지울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도식을 몇 번이고 재사용해서 효율적으로 새로운 기억을 생성한다.”
도식을 활용해 복잡한 상황을 신속하게 압축저장하는 능력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체스 그랜드마스터나 최고 수준의 운동선수들은 과거의 게임이나 경기를 통해 저장된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해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뇌는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일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특히 극단적인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20세기 초 미국의 한 남성은 심지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기억의 변형 가능성은 피해자들의 진술을 믿을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저자는 기억의 변형 가능성이 사회적 약자들을 공격하는 데 오용돼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스스로를 의심하는 마음과 혼란의 씨앗을 뿌릴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연구 결과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잘못된 정보의 효과를 다룬 문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억이 변형될 수는 있지만 흐물흐물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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