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내파밸리 와인메이커
첫 한인 여성 세실 박
와인메이커 세실 박이 서울 청담동 ‘르몽뒤뱅’ 셀러에서 자신이 만든 ‘이노바투스’ 와인을 들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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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박(박수연)씨는 미국 대표 와인 산지인 캘리포니아 내파밸리에서 활동하는 와인메이커다. 내파밸리에는 한국계 와인메이커도 드물지만 한국계 여성으로는 그가 유일하다.
자신의 와인 ‘이노바투스’를 소개하기 위해 최근 서울에 온 박씨는 “MBA(경영대학원) 공부하러 미국에 간 스물일곱 살 때까지 와인을 마셔보지도 않았고, 와인 생산을 총괄하는 와인메이커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지금은 내파밸리에서 “와인계를 변화시키는 선두 주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와인 배경이 없었기에 오히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혁신할 수 있었어요. 한국에 맞는 포도 품종을 찾아 한국에서도 좋은 와인을 생산하고 싶습니다.”
◇이 향기로운 발효 음료는 무엇인가
평생 처음 마셔본 와인 맛은 어땠을까. 그는 “세상에 이렇게 맛있고 향기로운 발효 음식이 있었나 싶고 완전히 반해버렸다”고 답했다. “제가 유학을 떠난 2001년 국내에는 제대로 된 와인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때까지 마셔본 건 엄마가 포도에 소주와 설탕을 붓고 쟁여놨다가 달착지근하게 마시는 포도주밖에 없었지요(웃음).”
“전혀요. 수퍼마켓에서 구입한 대중적인 와인이었어요.”
“와인에 푹 빠져서 지내다 와인 메이커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너무 반가웠죠. 오래 꿈꿔온 일 같았어요. 전문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내 길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MBA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어차피 MBA나 와인이나 모르는 길이었어요. 와인은 아무 지식도 인맥도 없고, 그래서 무섭고 두렵지만 도전하고픈 마음이 들었고요. 그렇다면 마음이 가는 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요.”
“반대하셨죠. ‘여태껏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살았는데 갑자기 웬 와인이냐’며. 하지만 저를 믿어주셨어요.”
-MBA를 하려던 이유는.
“연세대 생명공학과 졸업하고 식품 회사에 취직했어요. 연구소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마케팅 부서로 발령 났죠. 어차피 마케팅으로 빠졌으니 커리어를 위해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MBA 하러 미국 갔다가 와인에 빠질 줄이야(웃음).”
세실 박이 내파밸리 ‘이노바투스’ 셀러에서 와인 숙성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아영에프비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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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파밸리에서 바로 취업했나요.
“내파 와인 컴퍼니라는 곳에 취직했어요. 와인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생산 설비를 임대해주는 회사예요. 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공대를 나왔으니까 실험 도구 사용법 등 기본 지식은 가지고 있었거든요. 거기서 7년을 일하며 와인 생산을 배웠죠.”
-그 후 ‘와인포니아’를 설립했습니다.
“개인이나 기업, 단체를 위한 ‘프라이빗 라벨 와인’을 만들어주는 회사예요. 미국 여자 프로골프(LPGA) 와인을 만들어주기도 했어요. 와인 생산 컨설팅도 하고요. 와인포니아라는 이름은 ‘와인’과 ‘캘리포니아’를 합쳐 만들었죠.”
“지드래곤을 좋아해요. 그가 와인을 만들어 달라면 언제나 ‘예스’죠, 하하.”
-2012년 다시 대학에 입학했는데.
“두 가지 이유였어요. 와인 만드는 건 알겠는데, 와인 생산과 관련된 기술 용어들을 모르겠더라고요. 업계 종사자들과 깊은 의사소통이 힘들었어요. 학교에서 정확하게 배워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포도 재배에 대해 배우고 싶었어요. 와인 메이킹은 포도를 받는 순간부터 시작되지만, 와인의 품질은 포도밭에서 이미 결정됩니다. 얼마나 뛰어난 품질의 포도를 생산하느냐에 달렸거든요. 와인학으로 이름난 캘리포니아대(UC데이비스)에서 와인 양조와 포도밭 관리를 공부했습니다.”
-포도밭에서 직접 일도 하나요.
“1월부터 포도를 수확하는 8월까지는 포도밭에 살아요. 포도밭이 낭만 있어 보이지만 벌레에게 자주 물리고 뱀과도 싸워야 하죠. 사슴을 조심해야 합니다. 포도밭에 들어와 새순을 따먹으면 그해 포도 농사는 망한 거예요.”
◇한국서도 뛰어난 와인 만들고 싶어
세실 박은 UC데이비스 졸업 후 자신의 와인 브랜드 ‘이노바투스(Innovatus)’를 설립했다. 라틴어로 ‘혁신’이라는 뜻. 도전과 노력으로 내파밸리를 세계적 와인 산지로 만든 이민자들의 열정을 기리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카베르네소비뇽, 샤르도네, 비오니에 등 다양한 포도 품종으로 7가지 와인을 만든다.
이노바투스는 혁신적인 와인 ‘퀴베 내파 레드 블렌드(이하 퀴베)’로 주목받는다. 피노누아(pinot noir)와 시라(syrah)라는 두 포도 품종을 블렌딩했다. 와인은 여러 품종을 혼합해 만드는 경우가 흔하지만, 피노누아와 시라는 웬만해선 잘 섞지 않는다. 섬세한 피노누아와 강건한 시라를 서로 어울리게 하기가 힘들기 때문.
퀴베는 “놀라운 조화를 보여준다”는 호평을 받았고, 비즈니스 전문지 ‘포브스’와 와인 전문지 ‘와인&바인스’ 등에서 “세실 박은 도전 정신으로 와인 업계를 변화시키는 선두 주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어떤 와인을 만들고 싶은가요.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서 먹어봤을 때 느낌을 와인에 그대로 담아 소비자에게 전하고 싶어요.”
미국 내파밸리 포도밭에서 작황을 살피는 세실 박(왼쪽)과 이노바투스 포도밭. /아영에프비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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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와인메이커는 내파밸리에서도 드물 텐데(2021년 미 샌타클래라 대학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내파밸리 와인 메이커 중 여성은 12%에 불과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 여성 와인메이커가 있지만 몇 명 되지 않아요. 하지만 요즘 와인 트렌드가 여성 와인메이커의 섬세함을 찾고 있어서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한인 여성 와인메이커로서 힘든 점이라면.
“물론 많지만 저는 장점을 봐요. 피노누아와 시라를 블렌딩한 건 아무도 못 할 일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 이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그런데 두 품종을 섞어 보니 ‘이국적(exotic)’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멋진 와인이 탄생했습니다. 제가 와인 배경이 없고,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와인메이커로서 보람을 느낀 순간은.
“제가 만든 첫 와인을 부모님과 엉엉 울면서 함께 마셨어요. 그때 와인 메이커가 되길 잘했다고 느꼈어요. 이제 부모님은 제 와인만 드세요(웃음).”
-한국 전통 농법을 내파밸리에 도입할 계획이 있다면서요.
“서양 유기농 업계에서 ‘코리언 내추럴 파밍(한국 자연 농법)’이 보편화되고 있어요. 아직 와인 업계에는 덜 알려졌는데, 제가 이걸 포도밭에 도입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 양약을 써야 할 때가 있고 한약을 써야 할 때가 있잖아요? 동서양 유기농법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접근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발효시킨 깻묵이나 한약재는 화학비료 대신 쓸 수 있어요. 담뱃재는 조금 희석시켜 뿌리면 병충해를 막아주고요.”
-한국은 와인 생산에 필요한 테루아(terroir·자연 조건)을 갖지 못했다고 하는데.
“덥고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 때문에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에 부적합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한국보다 여름이 더 습하고 더운 일본에서도 좋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어요.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한국 음식과 와인이 어울리나요.
“저는 시라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감자탕과 즐겨 먹어요. 힘이 있어서 진하고 기름진 감자탕과 짝이 맞아요. 시라 와인은 자극적인 한식과 전반적으로 잘 어울립니다.”
-미국에서는 어떤 와인이 인기인가요.
“카베르네소비뇽 품종으로 만든 레드와인을 여전히 가장 많이 마십니다. 하지만 피노누아의 인기가 치솟았어요. 카베르네처럼 진하고 묵직한 와인보다 피노누아처럼 가볍고 산뜻한 와인을 선호하는 게 세계적인 트렌드죠.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들었어요. 화이트와인은 신선하고 산미가 강한 소비뇽블랑이 샤르도네를 위협하고 있지요.”
-좋은 와인이란 뭘까요.
“마음을 건드리는 와인이죠. 사람은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감정으로 움직입니다. 와인은 기쁠 때는 더 기쁘게 해주고, 슬플 때는 위로가 되지요. 마음과 감정을 울린다는 점에서 와인이 독보적이라고 생각해요.”
-나한테 맞는 와인을 고르는 방법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와인을 ‘공부해야겠다’며 접근합니다. 와인은 즐겨야 합니다. 라벨을 보지 말고 무조건 많이 마셔보세요. 마셨을 때 좋은지 아닌지 판단하세요. 좋다면 ‘왜 이 와인이 맛있지?’ 질문하면서 나한테 맞는 와인을 찾아가면 됩니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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