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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안 보여도 42.195㎞ 완주한 비결…‘신뢰의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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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마라톤에서 풀코스 완주한 선지원씨(가운데)와 가이드 러너 이재진씨(맨 왼쪽), 장지은씨. 이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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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아침 7시, 서울 노원구 중계동 당현천변. 이른 아침 찬 바람에 오던 봄이 머쓱해진 이날, 러너 복장을 한 선지원(34)씨와 이재진(49·필명 올레)씨가 단단한 끈의 양쪽을 서로 붙잡은 채 달리고 있었다. 이씨는 이 끈을 “트러스트링”이라고 불렀다. ‘신뢰의 끈’이란 뜻이란다. 러닝에 왜 끈이 필요할까. 선씨 때문이다. 선씨는 2017년께 달리기에 입문해 2021년부터 장애인 육상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중증 시각장애인이다. 현재 전남장애인육상연맹 선수인 그는 한국전력공사 소속이다. 이씨는 선씨의 ‘가이드 러너’(장애인들과 보조를 맞춰 함께 달리는 이)다. 그는 유튜브 채널 ‘마라닉티브이(TV)’를 운영하며 국내 러너들 사이에서 ‘러닝 스승’으로 불리는 이다. 구독자 19만6천명(18일 기준). 전문 콘텐츠 채널로는 놀라운 숫자다. ‘누구나 꾸준히 즐겁게 달리자’는 철학을 채널 이름에 녹였다. ‘마라닉티브이’는 ‘마라톤을 피크닉처럼’의 줄임말이다.



시각장애인 육상선수에게 가이드 러너는 중요한 파트너다. 가이드 러너가 없으면 경기 참여가 어렵다. 선수와 가이드 러너가 끈으로 서로의 손목을 묶고 함께 뛰는 게 장애인 육상 경기의 규칙이다. 0.5m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선수와 가이드 러너를 이어주는 훈련용 ‘트러스트링’.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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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을까? 선씨에게는 7년을 함께한 가이드 러너 장지은(36)씨가 있는데도 말이다. 이씨 거주지의 이웃 주민이었던 선씨가 경기 부상으로 잠시 쉬고 있을 때 지역 장애인 복지관 직원이 두 사람을 연결해줬다. 부상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는 선씨가 기력을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지원님이 다시 달릴 수 있게 돕자 정도만 생각했는데 몇달째 아침마다 달리고 있어요.” 이씨가 말했다. 이어 웃으며 덧붙였다. “함께 뛸수록 충만해지고 게으름 피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젠 (제가) 뛰자고 애원하는 입장입니다.” 무엇보다 함께 뛰면서 알게 된 기쁨이 크다고 했다. 선씨도 같은 생각이다. “이 끈 하나를 잡고 속도를 내야 하기에 신체와 마음이 잘 맞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느끼는 안정감과 스릴 같은 거, 희열이 있습니다.”(이재진) 선씨가 말했다. “중증 시각장애인 육상은 팀 종목과 다름없습니다. 가이드 러너가 없으면 뛰는 게 불가능하죠. 함께해 즐거움이 크죠.” 이씨에 대한 선씨의 신뢰가 묻어난다.



이씨는 장애인 육상 선수 세계도 알게 됐다고 했다. “지원님에겐 길의 작은 돌도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쉽게 발목이 삐게 되죠. 이런 이유로 강도 높은 훈련을 자주 해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훈련할수록 부상 확률이 높아져요.” 이씨는 실제 눈을 감고 달려본 적이 있다. 선씨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밀려왔는데, 그것을 극복해내는 지원님을 포함해 시각장애인 러너들을 존경하게 됐지요.” 선씨의 꿈을 알게 되면서 더 적극적으로 가이드 러너 활동에 임하게 됐다고도 했다.



선씨의 꿈은 패럴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 아직 한국엔 없는 기록이다. 어릴 때 꿈은 아니다. 특수교육교사 자격증이 있는 선씨는 대학 친구들처럼 교사가 되진 않았다. 번역물 관리, 기계 제조업체 고객 관리 감독 등 일반 사무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번아웃이 될 정도로 일에 매달리다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저 “건강을 좀 챙기자”는 마음에 남산에 갔다가 가이드 러너들과 함께하는 시각장애인 마라톤클럽에 매료됐다. 그의 잠재력을 알아본 한 아마추어 러닝팀 감독이 선수 생활을 권했다. 2023년까진 직장과 선수 생활을 병행하다가 이제 전업 선수다. 지난해 열린 제44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 여자 육상트랙 10㎞ 단축마라톤 부문에서 47분 기록으로 2위를 했다. “(앞을 보지 못한 채 달리는 게) 무섭지 않냐고 많이 물어보시는데,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가이드 러너)와 함께하는 게 좋습니다. 물론 시각장애인으로서 어려움은 있지만 달리기는 그런 것을 감수할 만큼 매력 있어요.”(선지원)



이름 아침 러닝 훈련을 하고 있는 이재진씨(사진 왼쪽)와 선지원씨.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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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가 그의 가이드 러너가 된 데는 필시 운명이 작동했다. 이씨도 일중독자란 소리를 들으며 업무에 매달렸다가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그는 방송사 몇곳에서 16년간 다채로운 예능 프로그램을 만든 피디였다. 방송 제작은 이른바 ‘갈아 넣어야’ 시청률이 오르는 등 성공 길을 걷는다고 알려진 일터다. 팽팽한 고무줄이 한순간 끊어진 것처럼 멘탈도 무너졌다. 그저 건강을 회복하자는 생각에 시작한 러닝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평온함과 삶에서 나만의 리듬을 경험”하면서부터다.



2016년 퇴사한 그는 지금까지 달리기와 함께하는 일상을 지켜가고 있다. 춘천마라톤 등 국내 마라톤 대회를 비롯해 러너들의 꿈, 미국 보스턴마라톤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마라톤까지 섭렵했다. 지난해 ‘마라닉 페이스’(푸른숲)도 출간했다. 1500여일을 10㎞씩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리며 자신이 얻은 삶의 충만함과 내면의 힘을 발견하는 과정을 다룬 책이다. 올해도 달리기 책 두권을 출간할 예정이다. 러너들과 함께하는 몽골 러닝 여행도 기획 중이다. 지난해 배우 진선규·고한민과 달린 대초원의 호쾌한 경험을 다른 이와 나누고 싶어서다.



유튜브 채널 ‘마라닉티브이(TV)’에선 다양한 달리기 이야기가 넘친다. 유튜브 채널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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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마라닉티브이(TV)’에 등장한 이재진씨. 유튜브 채널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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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지난 16일 새 도전에 나섰다. 세계육상연맹이 인증한 국내 유일 플래티넘 라벨 대회인 서울마라톤에서 참가자 4만여명과 함께 뛰었다. 선씨와 가이드 러너 장지은씨, 이씨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출발해 잠실종합운동장으로 들어오는 42.195㎞ 풀코스를 완주했다. 선씨가 이전에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부상으로 번번이 포기했던 풀코스 완주였다. 기록은 3시간51분. ‘피니시 테이프’를 끊는 감흥이 남달랐다.



“혼자 뛸 때보다 긴장감이 몇배가 됐고, 해내는 지원님 모습에 감동받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이재진) “초반에 다리에 쥐가 나 포기하고 싶었지만 가이드 러너 두분이 계셔서 완주할 수 있었어요. 힘든 여정을 마치는 일에 많은 분이 도움 주시는 걸 선수 생활 하면서 알게 됐어요. 더 열심히 하는 선수, 많은 이와 함께하는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선지원)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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