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철 작가의 1990년 작 유화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116.7×90.9㎝, 개인 소장).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소재로 한 광주 연작의 시발이 된 작품이다.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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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45년 전 참혹하게 삶을 접어야 했던 한 광주 청년의 얼굴을 담은 그림이 있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 도심에 보낸 계엄군에 붙잡혀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군홧발에 짓밟혀 절명한 20대 젊은이. 그의 주검은 피투성이가 되어 머리가 헝클어진 채 거적때기에 눕혀졌다. 눈은 온전히 감기지 않고 왼쪽 눈을 치떴다. 마치 산 자의 눈처럼 형형한 빛을 발한다. 무언의 절규를 던지는 듯하다. 선명한 다색 화면이어서 그림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란 제목 아래 1990년 이 그림을 그린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대가 신학철(82)은 그림 속 눈의 절규를 이렇게 풀어 이야기한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합심해 계속 싸우자는 거죠. 그릴 때 그 눈을 살려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습니다.”
신 작가의 광주항쟁 연작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광주는…’은 광주 운암동 광주시립미술관 1전시실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오는 30일까지 열리는 신 작가의 역대 최대 회고전 ‘신학철―시대의 몽타주’의 주요 출품작 가운데 하나다.
1970년대 모더니즘 운동 진영에서 아방가르드협회(에이지 그룹)에 몸담으면서 매체 작업을 했던 신 작가는 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로 일컬어지는 비판적 리얼리즘 진영으로 자리를 바꿔 활동했지만, 광주항쟁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언론 보도 등을 통해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듣는 정도였고, 모더니즘 진영을 떠나 본격적인 비판적 리얼리즘 작품을 선보이는 계기가 된 80년대 한국현대사 연작 작업을 시작할 때도 광주항쟁은 작품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광주항쟁이 절실한 소재로 다가오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그가 소속된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가 여는 정기 주제전 출품작을 구상하면서 우연히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찍은 참혹한 사진 모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단순히 참혹한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학살을 자행한 정권의 비정통성, 부정의함, 부조리함을 주검들이 증거하고 있었어요. 특히 비교적 온전한 외모를 유지했지만, 왼쪽 눈을 가늘게 치뜬 한 청년의 얼굴 모습이 유난히 제 눈에 밟혔어요. 그 눈을 좀 더 산 자의 눈처럼 크게 만들고 관객을 응시하는 쪽으로 바꿔서 그렸어요.”
신학철 작가가 1994년 그린 유화 대작 ‘한국현대사―초혼곡’(247×123㎝, 개인 소장). 조선 말기 동학혁명부터 항일독립투쟁과 4월 혁명 등을 거쳐 5·18 광주 민주화운동까지 이어간 민중항쟁의 거대한 흐름을 꿈틀거리는 불길의 형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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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마당 민의 주제전에 출품한 ‘광주는…’은 ‘시대정신을 반영했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그림을 사려는 이가 없어 작가의 작업실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광주항쟁 희생자 사진 모음은 이후에도 그의 뇌리에 강렬한 잔영으로 남으며 광주항쟁을 재조명하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작가는 5·18 최초의 항쟁과 광주 해방, 계엄군의 도청 진입과 시민군 진압 과정에서 나온 희생자들의 사진을 수년간 꼼꼼하게 분석했고, 그 결과 1994년 새로운 역작 ‘한국현대사―초혼곡’을 내놓기에 이른다.
전통 무악에서 망자들의 넋을 불러내는 초혼곡의 가락을 시각적으로 풀어내어 조선 말기 동학혁명군 모습부터 항일독립투쟁, 4월 혁명 등을 거쳐 5·18 광주 민주화운동까지 이어간 민중항쟁의 거대한 흐름을 꿈틀거리는 불길의 형상으로 담아낸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 그림에서 광주의 희생된 청년들은 불길의 가장 위쪽에 선 채로 너울거리면서 혁명적 에너지를 뿜어내는 중심 인물군으로 설정된다. 누워 있는 사진을 돌려 서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 혁신적 구상을 통해 작가는 망자들을 현재와 미래의 민중항쟁을 끌어내는 요소로 새롭게 전화시켜낸 것이다.
신학철 작가의 1995년 작 ‘한국현대사-초혼곡’(204×124㎝, 개인 소장). 광주항쟁을 단독 주제로 다룬 작품이다. 청년 희생자들의 주검 네구가 얽힌 모습을 다색톤으로 그렸다. 좌우 양쪽의 주검들이 각각 새와 꽃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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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그림에 넣었던 광주항쟁 청년 희생자들 이미지만 따로 구성해 이듬해 다색으로 그린 또 다른 ‘한국현대사―초혼곡’을 내놓았는데, 희생자들이 새와 꽃을 든 서정적 요소까지 스며들게 했다. 그의 회화 세계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적립과 전화, 계승의 양상은 광주항쟁 연작에서도 이어져 1996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을 포함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민중항쟁사를 총체적으로 그린 대작 ‘한국근대사―금강’을 완성한다. 1998~2002년 제작해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처음 공개한 회심의 대작 ‘갑순이와 갑돌이’에서는 굽이치는 항쟁의 불꽃 봉우리 가운데 하나를 광주 청년 희생자들이 수놓게 되는 구성으로 이어진다.
1990년 한 청년의 치뜬 눈을 한 주검 얼굴에서 비롯된 그의 광주 그림들은, 그림 한가운데 부각된 죽은 사람의 형상과 영혼을 불러오는 정죄의 의식을 상징하는 ‘초혼곡’의 시각적 풀이를 통해 우리 민족사에 장강처럼 물결쳐온 민중의 항쟁들이 5·18 민주화운동으로 하나의 맥을 잡고 이후 6월 항쟁과 박근혜 탄핵 투쟁으로까지 이어졌음을 드러내고 있다.
‘광주는…’ ‘초혼곡’ 연작들은 “징그럽고 끔찍한 그림”이라는 작가의 농 섞은 표현대로 사려는 사람이 없어 작가의 작업실에 10년 넘게 계속 보관됐다. 그러다 2010년 뜻밖에도 팔린다. 작품평을 썼던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한 사업가 지인에게 ‘훗날 역사적 평가가 빛날 명작’이라고 설득해 억대 값을 받고 판화와 함께 넘겨준 것이다. 작가는 “뜻밖에 들어온 거액을 당시 내가 이사장을 맡던 민족예술인총연합의 운영비로 쓰면서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단체를 살릴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10년 이상 못 봤던 작품을 전시장에서 다시 만나 너무 기쁘고 흐뭇하다”고 털어놓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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