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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전 알래스카의 경고 [윤지로의 인류세 관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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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알래스카 북부 노스슬로프와 남부 발데즈 항구를 잇는 길이 약 1287㎞의 원유 송유관.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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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지로 | 에너지·기후정책 싱크탱크 ㈔넥스트 미디어총괄



36년 전 오늘, 21만톤급 대형 유조선 엑손 발데즈호가 어둠이 깔린 알래스카 앞바다를 더욱 시커멓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3만7000톤의 기름이 찢어진 선체 사이로 흘러나왔다. 끈적한 기름띠는 죽음의 사자처럼 바다 생물을 집어삼키며 해안을 따라 2000㎞까지 번져 나갔다.



사건은 알래스카 발데즈항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향하던 발데즈호가 항로를 이탈하면서 벌어졌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운항 미숙이었는데, 항구 관계자들은 ‘올 게 왔다’는 반응이었다.



알래스카의 주요 유전은 북위 70도 극지에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개발하자고 하는 프루도만 가스전도 여기다. 북미 대륙 북쪽 끄트머리에서 퍼 올린 기름을 수요지로 실어 나르려면 관을 통해 남부 항구로 수송해야 하는데, 1970년대 유전 개발을 하면서 발데즈항이 낙점됐다. 당시 유일하게 얼지 않는 항구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삽을 뜬 지 1년쯤 됐을 때 미 지질조사국 과학자가 방송에 나와 찬물을 끼얹는 말을 던진다. “항구 인근 콜롬비아 빙하가 불안정해지고 있다.” 조사가 시작됐지만, 결과가 나왔을 때 발데즈항은 이미 하루 10만배럴 넘게 원유를 유조선에 실어 보내는 상황이었다.



과학자의 경고대로 1980년대 이후 콜롬비아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유빙이 항로까지 떠내려 왔고, 그때마다 유조선들은 항로를 벗어나곤 했는데 그러다 발데즈호가 좌초한 것이다. 이 사고는 기후변화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 기후변화가 경제적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초창기 대형사고였다.



장애물은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얼어붙은 땅에 파이프를 설치할 땐 열사이펀이 필요하다. 지반 온도를 영하로 유지하는 장치다.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설비가 냉각화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지금 있는 알래스카 종단 송유관(TAPS)에도 열사이펀이 사용됐다. 그런데도 2020년 파이프 지지대가 동토 해빙으로 손상돼 열사이펀을 추가 설치했다. 인간이 기후에 주먹을 날리면, 기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알래스카 원유 생산은 1988년 정점을 찍은 뒤 프루도만 유전의 매장량이 줄며 내리막을 걷는다. 엑손 발데즈 유출 사고로 환경규제가 강화되고 1980년대 중반부터 저유가 시대가 지속되면서 ‘굳이’ 알래스카까지 가서 신규 유전을 개발할 유인이 사라졌다. 한때 25%나 됐던 미국 내 알래스카 원유 생산 비중은 현재 3%로 줄었다.



프루도만 유전 운영사였던 비피(BP)는 2019년 자산을 다른 회사에 매각했고, 쉘(Shell)도 2015년 일부 사업 철수를 발표한 데 이어 작년엔 알래스카 북부 해리슨만의 18개 해상 유전 탐사권을 주 정부에 반납했다.



미국 정부가 손짓하는 곳은 이런 곳이다. 더구나 가스 사업은 본궤도에 오른 적이 한번도 없다. 25일 알래스카 주지사가 방한하면 한국은 가스 사업 참여 대가로 철강 관세 면제를 요구하리란 관측이 나온다. 게임에선 손에 쥔 패를 보여주면 안 되는데, 이 카드는 중국이 8년 전에 썼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중국 국영석유기업 시노펙은 알래스카 가스 개발 사업에 투자한다며 430억달러 협정을 맺었지만 2019년 철회했다. 겉으론 미·중 갈등, 속으론 낮은 경제성 때문이었다. 중국이 버린 카드를 용케 잘 써서 원하는 바를 얻어낸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알래스카 가스전 개발은 미국 사업이 아니라 공화당 사업이라는 점이다.



발데즈호 항로 이탈을 부른 콜롬비아 빙하는 40년 전보다 20㎞ 이상 후퇴했고, 두께는 절반으로 줄었다. 기후변화를 명명백백하게 알게 된 2025년, 정치적 리스크까지 안고 그곳에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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