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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1 (월)

우리 만날까요[맛있는 중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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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민트색 자전거를 타고 왔습니다. 안장 뒤에 커다란 바구니가 묶여 있었어요. 제 손에 들린 ‘나눔’ 상자와 바구니의 크기부터 가늠해 보았습니다. 들어갈까. 봄은 와 있었지만 그녀는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었어요. 로고 없는 검은 패딩은 그녀의 작은 몸을 더 작아보이게 했어요.

두 번째 중고거래지만, 그녀와 만난 건 처음이었습니다. 시작은 빨간색 동물 이동장 ‘나눔’이었어요. 나의 첫 고양이가 죽기 직전까지 병원을 오가며 사용했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주르륵, 눈물이 나는 물건이었어요. 지금 함께 사는 고양이가 이어 사용했는데 어느 날 이동장이 꽉 끼더라고요. 듬직한 뒷모습에 기쁜 마음으로 이동장을 놓아 보내기로 한 거예요. 중고거래앱에 ‘나눔’ 등록을 하고 제일 먼저 연락해 온 사람이 그녀였어요. 하지만 약속을 정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녀는 새벽에 “이제 들어와서”, “옷 꼴이 말이 아니라” 등의 메시지를 남겼어요. 결국 물건만 전달하는 비대면 ‘문고리 거래’가 되었죠. 그 과정에서 그녀가 자정부터 새벽 6시까지 동네의 길냥이들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너무 많은 양을 주문해 버린 고양이 사료를 다시 나누기로 한 두 번째 거래에서 마침내 그녀를 만난 것이죠. 따뜻하고 곧은 사람을 말이에요.

당근 유니버스에선, 내가 알지 못하고 죽을 뻔했던 놀라운 세계와 마주치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나눔을 하지 않았다면, 15년 동안 매일 밤 민트색 자전거를 타고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만나 고양이의 일생과 사람의 시간에 대해 오래 오래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이웃과 나눔 할 기회가 없었다면, 고양이 밥에 독극물을 섞는 사람과 필요할 때는 오지 않는 구청, 동물보호단체의 이면에 대해 어떻게 함께 분노할 수 있었겠어요. 영하의 새벽, 재개발 지역에 버려진 개들의 눈빛이 무섭긴 하지만, 그녀가 밥 주는 사람이라는 건 개들도 알아본다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의 눈을 내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인스타그램은 하지 않았지만, 당근거래는 열심이었어요. 고양이를 돌보는 데 필요한물품을 사고, 불필요한 물건을 찾아 판다고 말했습니다. 사료값이 폭등해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내놓는 중이라고요. 중고거래앱에서 본 그녀의 판매물품들이 떠올랐습니다. 바람막이 점퍼와 베이지색 코트, 방한화, 14K 목걸이를요. 아무 사연도 없는 목걸이였나. 봄이 왔다고 방한 용품을 다 파는 건가. 올 겨울엔 어떻게 할 건가. 자전거를 타고 돌기에 땀이 쏟아지는 여름이 무섭지, 겨울은 패딩 없이도 견딜만하다고 그녀가 말했어요. 그런 순간에 저는 어째서 대치맘의 몽클레르 따위가 떠오르는 인간인지요. 희화화한 유튜브에 기분이 상해서 중고거래로 던진다는 윤기 나는 패딩 말이에요. MB 정부 때부터 입었던 몽클레르, 이젠 싫증날 때도 되었죠. 기분이 태도가 된다는 게 이런 건지도 몰라요. 그 태도의 총합이 인간을 규정하는지도요.

나는 야간 수면의 중요성과 ‘균형’에 대해 말했는데, ‘균형’이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수 있다고 그녀는 대답했어요. 걷지 못할 만큼 몸이 아프다면 동물을 돌보는 일은 중단한다, 하지만 지금은 초저녁에 잠을 자면 고양이를 돌볼 수 있다, 라고요.

중고거래에서 길냥이를 돌본다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선히 ‘나눔’을 해준다며 세상엔 착한 사람들이 참 많더라고 그녀가 말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 이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네 중고거래앱 커뮤니티에서 그녀처럼 동물을 구조하고 돌보는 사람들, 그들을 열정적으로 돕는 이들을 만날 수 있어요. 반려동물의 건강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약대생들도 있고요. 가족, 학교, 일 아닌 나와 아무 관계 없는 누군가를 몹시 만나고 싶어한 적은 언제였나, 생각해봅니다. 나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걸까요.

다시 빨간 이동장 이야기입니다. 푹신한 요즘 제품과 달리, 단단한 구식 이동장은 험한 상황에서 새끼들 구조하기에 딱 맞춤이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받은 가장 아름다운 ‘구매후기’였습니다.

@madame_carrot 당근, 고양이,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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