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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일)

자기 자리에 서지 못한 소나무의 운명[서광원의 자연과 삶]〈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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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요즘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들은 조경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 복잡한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자연을 느끼고 싶어 해서다. 다들 같은 마음이라 그런지 경관도 비슷하다. 아기자기한 폭포와 연못을 만들고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키 큰 소나무들을 심는다.

그런데 이런 소나무들이 시름시름 죽어가거나 생기를 잃고 힘없이 서 있는 일이 심심찮다. 나무 주사를 놓아도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나무를 판 업자나 나무를 심은 사람들에게 화살이 겨눠진다. 원래 시원찮은 나무를 팔았거나 잘못 심은 게 아닌가 해서 말이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우리나라 아파트들엔 특징이 있다. 남향이나 동향을 좋아해 다들 이쪽을 향한다. 인구밀도는 높고 수익성 확보 역시 중요하기에 갈수록 아파트 층수가 높아지다 보니 동과 동 사이에 심어진 나무들은 햇빛 보기가 쉽지 않다. 공간이 널찍하니 괜찮지 않냐 싶지만 소나무엔 공간이 다가 아니다. 햇빛을 듬뿍 받아야 하는 양지식물인 까닭에 그늘진 곳에 있으면 맥을 못 춘다. 외부 영업이 천성인 사람이 하루 종일 책상을 지키고, 공격수인 축구 선수가 골키퍼를 맡으면 잘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식물이건 사람이건 자기가 잘 해낼 수 있는 자기 자리, 자기 분야가 있고 생기와 활기는 여기에서 생겨나는데 말이다.

외향형인 사람이 있고 내향형인 사람이 있듯 식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양지바른 곳이라고 하면 무조건 좋은 곳으로 여기지만 진달래 같은 식물엔 그렇지 않다. 음지를 생존의 터전으로 개척한 까닭에 하루 종일 햇빛이 쨍쨍한 곳에 심으면, 원치 않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내향형 사람처럼 힘들어한다.

요즘 실내식물로 키우는 커피나무도 그렇다. 이들은 원래 어느 정도 그늘이 있는 곳에서 천천히 성장하는, 우리 식으로 하자면 느린 삶을 사는 식물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입맛에 딱 맞는 바람에 대규모 이주를 당해 고역을 치르고 있다. 그늘에서는 시장의 수요에 맞는 대규모 재배를 할 수 없어 하루 내내 땡볕이 내리쬐는 곳에 심어진 탓이다. 50년쯤 되던 수명이 15∼20년으로 줄고, 고혹적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윽한 향이 옛날 일이 된 건 그래서다. 수확량에 목숨을 건 재배업자들이 농약과 비료로 이를 상쇄하려 하다 보니 생태계까지 황폐해지고 있다.

생태계엔 자기 자리라는 게 있다. 자신만의 전략으로 개발하는 생태 지위가 그것인데, 이 과정에서 축적한 것들이 나중엔 자신만의 특성이 된다. 초원의 사자들에게 느껴지는 ‘포스’가 동물원 사자에게 없는 건 있어야 할 자리, 진짜 자기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자기 자리는 중요하다. 회사에서 ‘책상을 뺀다’는 말이 왜 그렇게 무서운가. 자기 자리가 없으면 제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기 자리를 모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다면 스스로 위기를 부른다. 있어야 할 곳, 자기 자리를 아는 건 아주 중요한 능력이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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