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80주기 / 어둠 넘어 별을 노래하다] [1] 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80주기를 맞아 그의 시를 새롭게 읽는 자리를 마련했다. 윤동주는 어둠의 시대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올바른 길을 찾으려 했다.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그의 시에 담긴 진실의 힘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를 희망한다. /편집자
일러스트=이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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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혐오와 분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 두 패로 나뉘어 맞서는 형세는 너무도 살벌하고 전투적이어서 내전을 연상케 한다. 이쪽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맹신을, 저쪽에 대해서는 철저한 불신을 일관되게 토로한다. 서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친 언어로 상대를 적대시하며, 남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매섭고 사나운 눈길을 보낸다. 이런 상황이니,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포용 같은 말은 사전에만 남은 죽은 단어가 된 것 같다.
이 황잡한 시대에 윤동주의 시를 다시 읽는다. 지금보다 가혹한 시대를 산 윤동주는 그 암울한 상황에서도 사랑과 포용과 희망을 노래했다. 바로 이 점이 윤동주의 고결한 특성이다. 윤동주는 다른 어느 시인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남긴 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고 등불이 된다. 그의 시에는 어둠을 밝히는 진실의 빛이 있고, 고통을 달래는 위안의 손길이 있으며, 만물을 포용하는 사랑의 온기가 있다. 그의 순정한 시에 담긴 정결한 기운을 되살려 지금 우리 마음에 녹여 넣고 싶다.
단 한 점도 부끄러움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결의를 내세운 후, 윤동주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썼다. 잎새에 바람이 이는데 왜 괴로워한단 말인가? 그렇게 작은 변화가 일어나도 그것이 자신의 어긋남과 관련이 없는지 돌이켜보았다는 뜻이다. 세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것과 관련지어 자신을 되돌아보는 예민한 자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지니고 살면 시련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는 말에는 기독교적 소명 의식이 담겨 있다. 소명의 길을 걸으면서 그가 소임으로 내세운 것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일이다. 윤동주 시 여러 편에 별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대부분 순수성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 시에서 별은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갈 길을 이끌어주며 생명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윤동주는 바로 그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죽어가는 것(the mortal creature)’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뜻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죽어가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말처럼, 세상 모든 존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세상에 대한 겸허와 연민이 생긴다. 윤동주는 세상 모든 존재를 겸허한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사는 길이라고 믿었다. 스물네 살의 젊은이가 첫 시집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높고 정결한 마음을 펼쳤다. 이 정결한 발언을 지금 우리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 미세 먼지 가득한 상황에서는 밤하늘의 별조차 보기 어렵다. 그러나 자연을 탓하기 이전에, 하늘을 우러를 순수한 마음을 잃은 것이 더 큰 문제다. 혐오와 불신이 가슴에 가득 차서 사랑과 연민이 뿌리내릴 토양이 사라졌다. 윤동주의 별은 바람에 가물거리면서도 사랑의 길을 비추어 주었는데, 지금 우리는 소망과 사랑을 염원할 마음의 별을 잃었다.
윤동주의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각자 마음의 별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마음속 어딘가 남아 있는 순수의 기운이 있다면, 그것을 자신이 추구하는 상징의 별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바람에 괴로워하는 존재,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서로 연민과 사랑의 눈길을 주고받기를 소망한다. 가혹한 시대에도 고결한 마음을 갈고 닦은 청년 윤동주의 시를 다시 읽으며, 혐오의 거리에서 벗어나 이해와 화합의 길로 들어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윤동주는 시집 자필 원고를 세 권 만들어서 한 부는 은사 이양하 교수에게 드리고, 또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주고, 한 부는 본인이 지녔다고 한다. 이 중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정병욱의 소장본뿐이다. 그 원고에는 표지에 시집 제목이 있고 다음 쪽에 제목 없이 이 시가 실려 있다. 그러니까 정병욱이 받은 원고에는 이 시의 제목이 없다.
시인 윤동주가 1941년 '서시'를 쓴 육필 원고. |
그런데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형이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집에 돌아왔을 때 시집 원고에서 ‘서시’란 제목을 분명히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정병욱에게 원고 한 부를 건네준 다음에 자신이 갖고 있던 원고에 ‘서시’란 제목을 추가한 것일까? 그 원고가 사라졌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1948년 초판본 시집에는 이 시 위에 “서시”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어구가 어색하게 병기되었다. 정병욱 소장본과 윤일주의 증언이 엇갈렸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했을 것이다. 1955년에 재판본이 나올 때 비로소 ‘서시’라는 제목으로 시집 맨 앞에 실렸다.
이런 이유로 이 시의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윤동주가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해서 표지에 제시했는데 그다음에 나오는 시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일 리는 없다. 그러니 동생 윤일주의 기억에 무게를 실어주는 수밖에 없다. 1955년의 재판본도 그런 취지로 이 시 제목을 정했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알려진 지 70년이 되었고, 더군다나 이 시가 윤동주 시 전편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으니, ‘서시’라는 제목이 합당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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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원 서울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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