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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1 (월)

나를 복제하고 싶나요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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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승미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반도체물리학 박사)



요즘 나는 나를 복제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둘째가 수술을 받을 때 곁에 있어 줄 엄마인 나, 오랜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연구비를 따기 위해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는 나, 위원회 활동 보고 회의에 참석하는 나, 여러 나라의 연구 기관이 참여한 측정에 관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나, 공동 연구 논문 심사자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는 나. 모든 일이 나 혼자만의 사안이 아니며 정해진 시간 안에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한다. 이 중에 어떤 일도 피할 수도, 미룰 수도 없다. 엄마인 나, 과학자인 나, 자연인인 나, 이렇게 세명의 내가 있다면 한숨 돌려가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무릎 수술을 받게 되어 밤새 물 한 모금 못 마신 채 병상에 누운 둘째를 바라보며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인간 복제에 관한 생각은 내가 처음이 아니다. 그저 생활에 지친 인간의 공상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진지한 화두이기도 하다.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미래 사회 ‘멋진 신세계’에서는 계급마다 인간이 공장에서 찍어낸 듯 대량생산되었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에서는 이상적인 내가 현실의 나를 차츰 잠식했으며, 사람의 손톱을 먹은 쥐가 똑같은 사람으로 둔갑했더라는 전통 설화도 있다. 문학에서뿐 아니라 철학에서도, ‘테세우스의 배’를 비롯한 정체성과 동일성은 논쟁이 계속되는 주제이다. 지금의 나와 50여년 전에 돌잔치에서 걸음마 하던 아기를 똑같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란 말인가?



언뜻 당연하게 여기던 인간사를 곱씹는 사람들이 철학자이고 당연하게 보이던 자연사를 파고드는 사람들이 과학자다. 현대 영국 철학자 데릭 파핏은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에 등장하는 트랜스포터를 활용한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트랜스포터는 사용자를 원자 상태로 분해해서 다른 별에서 다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가상의 기계장치다. 과연 트랜스포터는 단지 여행 수단일까, 아니면 지구에서 분해된 인간과 화성에서 다시 생성된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일까. 파핏은 ‘나’라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관계, 기억, 성격을 포함한 심리적 연결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미래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개인에게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기억마저 복제된 복제인간은 ‘나’이며 ‘나’라는 존재의 유일성은 더 이상 중요하지도, 의미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나’는 기억과 관계라는 흐름 위에 경계선조차 흐릿한 그 무엇이라는 걸까.



한편 ‘몸과 살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좀 더 살갗에 와닿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자체이다”라고 소개되는 그의 철학에 따르면, 몸은 세계를 살아내는 주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에 사로잡혀왔던 기존의 서양철학과는 매우 다른 시각이다. 몸의 주체성을 강조한 그의 시각으로는 몸이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게 아니라 세상을 느끼고 반응하고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에 따르면 복제된 몸에 같은 기억을 이식한다고 한들 그건 ‘나’일 수가 없다. 다른 몸이라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 복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 하나의 몸뚱이로 여러개의 마음을 품고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살아간다. 규칙을 어기고 활강한 스키장 무법자와 부딪힌 둘째가 크게 다쳐서 억울하고 화났던 일도, 무릎 십자인대 완전 파열이건만 인력 부족으로 몇달째 수술 예약이 밀린 속상한 사회 상황도, 언젠가는 잊히리라. 둘째의 인생 끝까지 함께할 것은 수술 자국이 남은 무릎을 가진 몸이다. 나 역시 단 하나뿐인 내 몸이 새삼 고맙고 안타깝다. “사람 나이 쉰이 넘으면 자기 몸에도 정기 사용료를 내야 한다. 병원비든 보약값이든”이라는 농담이 씁쓸한 현실 같은 오늘도 내 안에는 여러 ‘나’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만들어진 지 어느덧 50년이 넘은 낡아가는 이 몸뚱이 하나가 그 많은 ‘나’들을 지탱하는 유일한 세계다.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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