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줄 묶인 채 집주인 대피해 굶주린 채 고립
몸 곳곳서 피부 녹아 근육과 뼈 드러나 '신음'
강원 산불 때 4만 마리 사망 "이번엔 그 이상"
27일 경북 안동 임동면 박곡리에서 동물권단체 케어 소속 활동가가 굶주린 개들에게 사료를 주기 위해 사료 봉투를 뜯고 있다. 안동=허유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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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방금 개 짖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27일 오후 8시 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산불로 통신·전기가 끊겨 칠흑 같은 산골에서 동물권단체 '케어' 활동가 팽윤재(30)씨가 다급히 외쳤다. 팽씨가 입으로 "똑똑" 소리를 내자, 털이 까맣게 그을린 백구 여섯 마리가 언덕 아래 잿더미 틈에서 헐레벌떡 팽씨 곁으로 달려왔다. 개들은 살려 달라는 듯 연신 꼬리를 흔들더니 도로 위에 배를 내보이며 드러누웠다.
개들이 달려온 쪽으로 내려가니, 화마에 전소된 마을이 보였다. 마당에 있던 개집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길에 녹았고, 텅 빈 사료 그릇과 물그릇이 나뒹굴었다. 팽씨는 "(백구들이) 최소 2, 3일은 굶은 듯한데, 임신한 개도 있는 것 같다"며 사료 포대를 뜯었다. 허기진 개들이 달려든 5kg짜리 사료는 개봉 10분 만에 동났다.
이달 22일 의성군을 시작으로 경북 지역 산불이 급속도로 확산하자 동물 구호를 위해 케어 활동가 7명이 화마가 휩쓴 안동에 급파됐다. 한국일보는 27일 케어 활동가 팽씨와 이은영(52)씨를 따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동물들을 찾았다. 2002년 설립된 케어는 24년째 화재 등 재난 상황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동물들을 구조해왔다. 전날 현장에 도착한 활동가들은 하루 2시간 쪽잠을 자고 끼니를 거르면서 이틀간 산불로 다친 개 15마리를 구조했다. 이씨는 2019년 4월 강원 속초·고성 대형 산불에 이어 6년 만에 동물 구호에 나섰다. 그는 "남편이 이번엔 너무 위험하다고 강하게 만류했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고 말했다.
목줄에 묶여 산불 못 피해
27일 경북 청송 진보면 괴정1리에서 동물권단체 케어 소속 활동가들이 산불로 화상을 입은 개 대풍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청송=허유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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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산 속에서 가축은 화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때가 많아 동물구조 활동가들이 세심하게 살필 수밖에 없다. 주인들이 황급히 대피하는 사이 목줄에 묶여 있거나 우리에 갇힌 소, 개, 닭 등은 불길을 피할 수도 없다.
두 활동가는 불길이 덮친 집 마당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동물들을 찾아 다녔다. 마을에 들를 때마다 대여섯 채의 집을 구석구석 살폈다. 아직 화기(火氣)가 도는 안동 임동면과 청송 파천면 마을을 비롯해 마을 7군데를 수색했다.
27일 경북 청송 진보면 괴정1리에서 주인 채양자(오른쪽)씨가 산불로 화상을 입은 개 대풍이를 켄넬로 옮기려고 시도하고 있다. 청송=허유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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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재난 대비 시스템 갖춰야"
끔찍한 산불을 경험한 주민들은 재해 현장의 동물들도 방치돼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민간 동물단체들에 따르면, 2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다친 2019년 4월 강원 속초·고성 산불로 4만 마리 넘는 동물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됐다. 이번 영남권 산불영향구역은 28일 오전 6시 기준 4만6,927㏊로, 강원 산불(2,872㏊)의 16배에 달하는 만큼 동물 피해도 상당히 클 것으로 예상된다. 박소연 케어 대표는 "동물 대피소가 생긴다면, 동물구조단체들이 일일이 찾아다닐 필요 없이 사료 등을 후원할 수 있다"며 "주인들이 동물을 어떻게 보호할지 숙지할 수 있도록 동물 재난 경보 및 긴급 의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동·청송= 허유정 기자 yjhe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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