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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 (수)

바닥 모를 절망감에도 묵직하게 두드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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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린 2025 통영국제음악제 개막공연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통영국제음악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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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에 만개하기 시작한 봄꽃들이 쉬이 그냥 피어난 게 아니라는 듯, 지난 28일 통영국제음악제의 개막 공연은 어떤 절망에도 내재해 있을 희망의 격동을 노래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가 함께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통해서다. 2019년 만 15세 나이로 윤이상 국제음악 콩쿠르 우승, 2022년 미국 밴 클라이번 콩쿠르 최연소 우승을 거쳐 지난해 그라모폰상·디아파종 황금상 등을 휩쓴 임윤찬은 더 성숙해진 음악 세계를 거침없이 선보였다.

이 작품은 라흐마니노프가 깊은 슬럼프에 시달리다 3년 만에 써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든 곡이다. 앞선 교향곡 1번의 혹평에 좌절한 그는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우울함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1악장 도입부에 반복되는 첫 단조음 여덟 소절은 여리게 시작해 점점 깊고 강해져 바닥 없이 떨어지는 절망감을 보여주고, 이후 폭풍처럼 몰아치다가 또 잦아드는 격정적 선율이 펼쳐진다. 임윤찬은 피아노로 시작하는 첫 음부터 건반을 묵직하게 누르며 슬픔과 희망, 고통과 회복이 교차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오케스트라와의 일사불란한 호흡도 돋보였다. 임윤찬은 클라리넷·플루트 등이 선율을 주도할 땐 연주자를 응시하며 피아노 음량을 조절했고, 더블베이스가 강렬한 저음을 쏟아내는 구간에서도 그에 맞춘 강한 타건으로 합을 만들었다. 오케스트라가 큰 성량을 낼 때도 그것조차 넘어버리는 강한 힘으로 피아노 소리가 묻히지 않게 했다.

임윤찬이 치는 건반은 음이 쏟아질 듯 고난도 기교가 많은 3악장에서도 한 음 한 음 또렷하게 귀에 들어와 박혔다. 절정에 다다를 땐 눈을 다 덮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이 단숨에 넘어갈 정도로, 몸과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그런 연주 구간이 지나면 작곡가 의도에 충실한 카타르시스(심리적 정화 작용)가 넘실대 객석을 압도했다. 눈물을 훔치는 여성 관객도 보였다. 곡이 끝나자 '꺅'하는 환호 소리와 함께 용수철을 튕기듯 기립박수도 터져 나왔다. 임윤찬은 이날 앙코르로 리스트의 '순례의 해: 두 번째 해 이탈리아' 중 페트라르카 소네트 104번을 선사했다.

한편 TFO와 프랑스 지휘자 파비앵 가벨은 윤이상 '서곡'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도 연주했다. 이번 오케스트라에는 베를린필·빈필·로열콘세르트헤바우 등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 단원들로 구성된 베르비에 페스티벌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연합해 연주를 들려줬다. 현악 파트의 웅장함과 관악 파트의 재치 있는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이날 1300여 석에 달하는 통영국제음악당은 일찌감치 매진됐고,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도 공연을 관람했다.

[통영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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