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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5 (화)

“웃음 예쁜 개구쟁이” 17세 소녀, 돌연 처형장서 최후…‘父비극’ 함께 휩쓸렸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나스타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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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사진 특별전

151. 아나스타샤

열 일곱에 처형된

비운의 대공녀

흑해 해변에 있는 아나스타샤 [Romanov family·일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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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종종 역사와 문학 이야기도 합니다.

‘장난꾸러기’ 황녀

아나스타샤 [Boissonnas et Egg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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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황녀는 러시아 황실 최고의 말괄량이였다.

그녀는 미인인 어머니를 닮아 얼굴이 해사했다. 붉은빛이 감도는 금발에 푸른 눈, 흰 원피스가 어울리는 맑은 피부와 새하얀 손발도 갖고 있었다. 언뜻 보면 핏줄에 걸맞은 기품과 분위기를 갖춰가는 대공녀였다.

그런데, 그런 소녀가 흰 장갑을 낀 채 초콜릿을 와구 집어먹는 걸 보면…. 설탕 묻은 손가락을 옷에 닦으며 배시시 웃는 모습까지 보다 보면….

온 국민이 관심 두는 아이치곤 너무 장난꾸러기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짐작할 수 있듯, 아나스타샤는 천진난만한 소동을 몰고 다녔다.

아나스타샤는 7촌인 니나 대공녀를 발로 걷어찬 적도 있었다. “저보다 키가 큰 걸 보고 울컥했어요.” 그녀는 부모 앞에서 이렇게 툴툴댔다. 아나스타샤는 바쁘게 움직이는 귀족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일도 좋아했다. 가끔은 나무 위로 척척 올라가 시종의 얼굴을 사색으로 만들었다.

아나스타샤가 벌 받을 만한 일을 하기로는 황가에서 최고 기록을 세웠을 거예요. 사고를 치는 쪽에 있어선 실로 천재적이었죠.
그 시절 그녀를 지근거리에서 본 인사의 평가였다.

그래도 아나스타샤의 모습 자체가 황궁 내 신선한 모습이었을까.

심지어 붙임성 있는 예쁘장한 소녀가 그러고 다녀서였을까. 그녀는 온갖 사고를 일으켰지만, 황궁 안에서는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녀는 그래봤자 막 십 대를 넘긴 꼬마 숙녀였다. 게다가 가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러운 면을 보이기도 했다. 가령 아나스타샤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언니들과 함께 전쟁 부상병을 직접 마주했다. 이들의 손을 잡고 눈물로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녀는 봉사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 나이에 자선 사업을 벌일 생각까지 했으니.

흰색 드레스를 입은 아나스타샤 [Romanov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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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미워할 수만은 없는 황녀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궁금해진다.

속 깊은 미남 황족의 손을 잡고 유쾌한 가정을 꾸리지 않을까. 털털한 지도자가 돼 온 국민의 사랑을 받지는 않았을까. 이런 상상을 하기 쉽지만, 그녀의 삶은 의외로 청춘 로맨스도, 흐뭇한 드라마도 되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공포물에 가깝게 꾸며졌다. 꽃과 갈채의 해피 엔딩이 아닌, 피와 눈물이 장식하는 새드 엔딩이었다.

‘OTMA’의 탄생

아나스타샤 [Bain News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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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는 1901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헤센의 알릭스는 아나스타샤를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들의 네 번째 딸이었다.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그리고… 아나스타샤. 그러니까, 6년간 연달아 네 명의 딸만 낳는 일이 현실로 다가오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부부는 품에 안기자마자 생글생글 웃는 아나스타샤를 보고 얼굴을 폈다.

그래, 후계자를 낳을 시간은 아직 더 있으니.

금슬 좋은 부부는 이런 마음으로 서로를 다독였다. 아나스타샤는 신생아 때부터 ‘사슬을 끊은 황녀’라는 멋진 칭호도 얻었다. 니콜라이 2세가 아나스타샤의 출생 직후 죄수 대사면을 한 결과였다. 이는 아들 소식을 듣지 못한 데 실망한 귀족이나 국민에 대한 회유(懷柔)책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통통 튀는 성격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호리호리한 언니들과 견주면 키는 작고 애굣살이 있는 편이었지만, 그녀의 생기는 주변 사람의 정신도 뜨이게 할 정도였다.

내가 평생 봐왔던 어떤 아기보다도 매력적이었어요.
아나스타샤의 유모 또한 그녀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이른바 ‘OTMA’. [Romanov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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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씩 나이 차가 있는 언니들도 아나스타샤를 예뻐하며 보살폈다.

첫째 올가가 아나스타샤의 작은 엄마 역할을 했다. 자매 중 “가장 조각같다”는 평을 받은 둘째 타티야나는 아나스타샤에게 매무새를 조언했고, 셋째 마리야는 온화한 마음씨로 그녀의 장난을 받아주곤 했다. 아나스타샤가 구김살 없이 클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언니들 영향도 컸다.

네 자매는 언젠가부터 본인 이름의 앞글자를 따 자기네를 ‘OTMA(Olga·Tatiana·Maria·Anastasia)’로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함께 있으려고 했다.

‘거울 셀카’를 찍은 황녀

필기하는 아나스타샤 [Romanov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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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이어진 아나스타샤의 짓궂은 장난은, 어쩌면 그녀의 배출구 구실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분명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그녀가 결코 잊으면 안 되는 게 있었다. 황녀의 본분이었다.

어머니가 특히나 이 부분에 엄격했다.

검소와 성실.

그녀가 강조한 건 이 두 요소였다. 아나스타샤는 어릴 적부터 언니들처럼 딱딱한 간이침대에서 잠을 자야 했다. 옷은 자매끼리 돌려 입었으며, 웬만한 물건도 함께 쓰면서 낭비를 줄였다. 낮 동안 아나스타샤는 언어, 역사, 과학, 지리학에 춤과 음악, 외국 문화 등 책과 과외에 파묻혔다. 이 밖에도 종교, 스포츠, 사교술 등. 아무리 배워도 배울 게 산더미였다.

아나스타샤는 활기찬 외양과 달리 건강은 별로 좋지 않은 편이기도 했다.

그녀는 잔병치레가 잦았다. 태생적으로 등 근육이 약해 1주일에 2차례 이상 강도 높은 마사지도 받았다. 이게 너무 아프고 무서워 매번 장롱 안에 숨었다는 후문이다.

아나스타샤 본인이 찍은 ‘셀카’. [아나스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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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런 그녀에게는 엉뚱한 짓 말고 취미가 하나 더 있긴 했다.

사진이었다. 코닥의 브라우니 시리즈 사진기를 갖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가족의 사진을 즐겨 찍었다. 그녀는 셀카도 촬영했다. 이는 훗날 10대가 찍은 ‘거울 셀카’ 중 가장 오래된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알렉세이, 마지막 ‘A’ 맞추다

아나스타샤와 알렉세이 [Romanov Faml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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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OTMA’는 또 한 명의 동생을 맞이한다. 이번에는 모두가 고대한 남자애였다.

이름은 알렉세이. 적갈색 머리칼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역시나 어머니를 빼닮아 아름다운 아이였다.

이번에는 아나스타샤가 아기를 가장 열심히 돌봤다.

알렉세이는 아나스타샤보다도 더 허약한 몸을 타고났다. 혈우병 때문에 앓아눕는 일도 많았기에, 점점 더 침울한 성격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네 살 터울의 아나스타샤는 장기인 친화력으로 그런 알렉세이를 보듬었다. 둘은 비밀스러운 문자를 만든 후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네 자매 연합인 ‘OTMA’는 그렇게 ‘A(Alexei)’가 하나 더 들어가 ‘OTMAA’로 덩치를 또 한 번 불렸다.

화목한 집안과 화려한 배경, 준수한 외모와 깊은 우애….

아직도 아나스타샤의 삶에 비극이 끼어들 틈은 없어보인다. 하지만, 재앙은 황궁 밖에서부터 스멀스멀 다가오는 중이었다. 이제부터 장르가 바뀐다.

황궁 밖 ‘장르’는 달랐다

가족과 함께 있는 니콜라이 2세. 왼쪽에서 오른쪽(니콜라이 2세 부부 제외)으로 올가,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 타티야나 [Boasson and Egg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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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제14대 황제이자 ‘OTMAA’의 아버지, 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2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그는 대체로 온화한 면을 보였으나 정치판에서의 현실 감각은 없는 편이었다. 유능함을 보인 지점도 어느 정도 있긴 했지만, 때마침 급변하는 시대를 받아들일 기민함도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입장에선 운이 없기도 했다. 나라 안팎에서 격랑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그가 행한 오판과 부족한 뒷심은 사태를 더 나쁘게 몰기 일쑤였다.

로마노프 왕조의 니콜라이 2세는 앞서 1894년에 즉위했다.

그렇게 ‘차르(군주)’가 된 그는 강력한 전제군주정을 수호하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이는 보수적이었던 선황(先皇) 알렉산드르 3세의 뜻을 이어받는 행보로 인식됐다. 하지만 옛 선황의 시대와 지금 그의 세상은 영 딴판이었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이들 [Unknown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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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19세기 중후반부터 빠르게 산업화를 이루고 있었다.

생산, 제조, 운송 등 모든 분야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처럼 빛이 내려오자 그림자도 따라붙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가혹한 환경에 처했다. 이들은 파업 등 노동 운동도 벌였다. 상당수 자본가는 여기에 반응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노동자 보호법이 생기긴 했지만, 이 조치에도 여전히 편법과 꼼수를 일삼을 뿐이었다. 노동자들이 품은 분노의 화살은 자본가보다 더 높은 존재를 향하기 시작했다. 상황 파악에 급급한 황제, 니콜라이 2세였다.

이런 가운데, 니콜라이 2세는 거듭 몸집을 키우고 있는 일본과 전쟁을 벌였다.

1904년부터 1년여간 이어진 러일전쟁의 시작이었다. 러시아는 국력에서 밀릴 게 없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싸움터에 임했다. 일본은 그런 러시아를 상대로 주도면밀한 전술을 보였다. 열강은 대체로 러시아의 압승을 점쳤다. 뚜껑을 열어보니 반대 결과가 있었다. 러시아의 패배였다. 당연히 러시아 전체에 침울한 분위기가 깔렸다. 경제도 휘청였다.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원성은 더욱 커졌다.

보치에흐 코작, 피의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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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 피의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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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결정적 사건이 발발했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었다.

1905년, 1월22일(이때 아나스타샤는 네 살이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평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이 바란 건 노동 환경 개선뿐이었다.

그런데….

황궁 경비대는 이들을 반란 세력으로 오인해 총을 갈겼다. 이번 일로 최대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러시아의 모든 국민이 이 일에 충격을 받았다. 니콜라이 2세는 그제야 두마(의회) 설치 등 전제군주정에서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이미 위태로웠다. 어느 정도 정국이 안정된 기간도 있었지만, 피의 학살을 보고 겪은 국민은 다시는 황실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러시아 또한 전장의 무대에 올랐는데, 적군인 독일을 상대로 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니까 ‘OTMAA’가 황궁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황궁 밖에서는 이런 암담한 일들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황가를 무너뜨린 혁명의 시대

연설하는 레닌 [위키미디어 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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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3월(율리우스력 2월). 드디어 터질 게 터지고 만다.

“빵을 달라.” 노동자들은 이 구호와 함께 대대적 파업을 벌였다. 이들의 목소리는 삽시간에 대륙을 흔들었다. 진압을 명령받은 군 또한 이들 편에 서는 순간, 시위는 혁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니콜라이 2세는 걷잡을 수 없는 돌풍에 결국 권력을 포기했다. 그렇게 러시아 제국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 일은 율리우스력에 따라 2월 혁명으로 기록에 쓰인다.

혁명군은 비교적 온건한 성향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주도로 임시정부를 꾸렸다.

하지만 지금껏 울분을 쌓아온 노동자들은 더욱더 빠르고 급진적인 변화를 바랐다. 이러한 열망은 같은 해 11월(율리우스력 10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주도의 혁명을 또 한 번 불렀다. 볼셰비키는 ‘무산계급(無産階級·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 의한 정권 탈취와 체제 변혁’이라는 보다 과격한 기치를 앞세운 채 밀고 들어왔다. 이번 사태 또한 율리우스력에 맞춰 10월 혁명으로 기록된다. 이때 볼셰비키가 출범시킨 게 소비에트(Soviet) 정권이다.

이로써 300년 넘게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는 니콜라이 2세를 끝으로 완전히 끝장날 모습이었다.

갇혀버린 황녀들

궁 침실에서의 마리야, 타티야나, 올가, 아나스타샤 [Romanov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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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다시 말괄량이 아나스타샤 쪽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아나스타샤는 2월 혁명 후 황제직을 잃은 아버지 니콜라이 2세처럼 사실상 모든 직을 상실했다. 물론 이는 언니 올가와 타티야나, 마리야도 마찬가지였다. 막내 알렉세이 또한 이름뿐인 황태자였다. 이제 황가는 종이호랑이였다. 아나스타샤는 가족과 함께 차르스코예 셀로의 알렉산드롭스키 궁전으로 갔다. 그곳에서 사실상 갇힌 채 살았다.

황가의 입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좁아졌다.

특히 레닌의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으로 정권을 쥔 후부터 상황은 더더욱 암울해졌다. 황가는 결국 볼셰비키의 적대적 감시하에 이곳저곳 끌려다니는 처지로 몰리고 말았다. 볼셰비키의 군인들은 임시정부 인사들이 마지못해 갖추던 예 따위도 내버리고 짓밟았다.

궁 발코니에서 가족과 식사를 하는 타티야나 [Romanov family, 아나스타샤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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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발코니에서 가족과 식사를 하는 아나스타샤 [Romanov family, 타티야나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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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가는 이제 러시아어 말고 다른 언어를 쓸 수 없었다. 사진기 등 개인 소지품은 모조리 빼앗겼다.

니콜라이 2세는 더는 군복에 견장을 달 수 없었다. 황후, 그리고 아나스타샤 등 네 자매는 병사들이 울타리에 보란 듯 그린 음란한 낙서를 봐야 했다. 조롱 섞인 휘파람 소리도 들어야 했다. 매일, 밤낮으로.

의젓했던 첫째 올가는 하루가 다르게 창백해졌다. 둘째 타티야나의 반짝이는 외모는 군인들 사이 음담패설 소재로 쓰였다. 타티야나는 평생 처음 듣는 희롱성 말 틈에서 눈물을 쏟았다. 셋째 마리야는 그나마 잘 적응하는 듯 보였지만, 그녀 또한 총기를 잃은 지는 오래였다. 가장 불안한 건 막내 알렉세이였다.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알렉세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넷째 아나스타샤는 이런 환경에서조차 특유의 발랄함을 보이려고 한 걸까.

그렇게 부모, 아울러 끈끈하게 맺어진 ‘OTMAA’의 활력소가 되고자 한 걸까. 그녀는 갇혀있는 와중에도 언니들과의 연극 놀이를 기획하는 등 쾌활한 면을 보이고자 애썼다고 한다. 모두가 혼미한 가운데, 아나스타샤는 자진해 반려견 지미를 돌보기도 했다. 이처럼 끝까지 밝고, 정 많은 모습을 보이려고 했지만….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족 사진’ 촬영이라더니

니콜라이 2세의 사진. 생전 마지막 촬영이었던 것으로 추정. [위키미디어 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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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움직여야 할 시간이라고 합니다.”

1918년 7월 17일, 자정에 가까워진 무렵. 니콜라이 2세는 주치의의 속삭임을 듣고 잠에서 깼다. 당시 황제 일가는 예카테린부르크의 이른바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돼 있었다. “이 밤에?” 니콜라이 2세가 이불을 걷어올리며 물었다. “예. 그런데….” “무슨 일이 더 있는가?” “짐을 챙기면 지하실로 오시라고 합니다. 가족 사진을 찍어준답니다.”

웬 가족 사진인가. 우리네 초췌한 모습을 찍어 선전에 써먹을 작정인가.

옛 황제 부부는 의문을 품은 채 남매를 깨웠다. 대충 보따리를 싼 후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군인들이 간격에 맞춰 서있었다. 황가는 이들이 내뿜는 위압감에 얼어붙었다. 얼굴이 하얗게 뜬 알렉세이는 의자에 기대 겨우 숨을 내쉬었다. 지하실 문이 또 열렸다. 사진사가 왔을까했는데, 전혀 다른 실루엣의 군단이 모습을 보였다. 이들이 들고 오는 건 촬영 장비로 볼 수 없었다. 검고, 길고, 묵직한 무언가…. 그것은 탄환이 장전된 총다발이었다.

“옛 황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씨.”

볼셰비키의 사령관급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 “반혁명 세력이 당신들을 구출하려다가 실패했다고 하오. 이에 따라….” 그의 말은 고요한 지하실 전체에 울려퍼졌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당신 일가에게 사형을 선고했소.”

…뭐라고 했는가? 잘 들리지 않는데.
니콜라이 2세는 건물 밖 자동차의 소음 탓에 통보를 듣지 못했다(“그럼….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라고 말했다는 설도 있다). 옛 황후와 첫째 올가만이 분위기를 파악한 채 성호를 그었다. 병사들은 더는 틈을 주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로마노프 가문이 살해된 집의 지하실. 처형 이후 수사관들이 증거를 찾기 위해 벽을 찢은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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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와 황후는 총을 맞고 즉사했다.

아나스타샤 등 ‘OTMAA’는 바로 죽지 못했다. 그래도 결과는 같았다. 올가와 타티야나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숨졌다. 베개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마리야, 그리고 아나스타샤 또한 곧 사망했다. 볼셰비키 입장에선 결코 살아남아선 안 될 알렉세이는 책임자가 직접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했다. 셋째 마리야는 시신 처리 중 다시 정신을 차렸는데, 병사들이 그녀를 구타해 재차 숨통을 끊었다는 말도 있다.

이때 니콜라이 2세는 쉰 살이었다. 아내 헤센의 알릭스는 마흔여섯 살이었다.

올가는 스물셋, 타티야나는 스물하나, 마리야는 열아홉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고작 열일곱, 알렉세이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정치의 희생양이 되다

‘OTMAA’의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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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태가 있기 직전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볼셰비키 조직은 이들의 집권에 반대하는 반(反)혁명군, 이른바 백군을 맞붙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백군이 니콜라이 2세, 그가 아니라도 아들이든 딸이든 한 명이라도 확보하는 시나리오를 두려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백군 측 군대가 황제 일가의 감금지로 밀고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들은 그 군대가 황가를 구출하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날, 전원 처형을 서두른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뒷수습에도 공을 들였다.

니콜라이 2세는 그렇다고 해도, 아직 십 대였던 소년 소녀까지 죽인 건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었기에. 볼셰비키 측에서는 황제의 처형을 발표하면서도 “황제의 처자식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는 식의 거짓 발표를 내놓기도 했다. 누가 실질적으로 이 학살을 명령하고 승인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보트 위의 아나스타샤 [Romanov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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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랑스러움을 꽃피우지 못한 채 생을 끝맺은 아나스타샤.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부활’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일까. 끔찍한 학살 후, 러시아 내에선 유독 아나스타샤 생존설이 설득력을 얻고 널리 퍼졌다. 그러다 1991년, 황제 일가의 시신이 공식 발굴됐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혼선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일가 전원이 그날 총살로 죽었다는 게 확실해졌다.

아나스타샤는 황녀답지 않은 독특한 매력, 결국 참담하게 끝난 일생 등으로 여러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각국의 문화예술계가 그녀를 거듭 부활시키며 생을 다시 짚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도 다수의 영화, 소설, 애니메이션 등에 주인공 격으로 모습을 보인다.

공주는 원래 남자로 태어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로 태어났으니, 위대한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아나스타샤가 출생할 당시 예언가의 말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 그녀의 역사는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으니… 어떤 방향에선 이 예언이 완전히 틀렸다곤 볼 수는 없는 걸까. 물론 이는 아나스타샤가 원했던 ‘위대한 삶’이 아닌 게 확실하기에, 켜켜이 쌓인 안타까움을 덜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참고자료
러시아 혁명, E. H. 카, 이데아

혁명의 러시아, 올랜도 파이지스, 어크로스

기자의 말풍선
헤럴드경제

마흔에 보는 그림



신간 <마흔에 보는 그림>이 한 대형 서점 체인에서 곧장 예술 1위(주간)로 올랐습니다.

독자님들께서 보여주신 많은 관심 덕입니다.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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