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 당시 모습./사진=머니투데이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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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8일 오전 6시30분쯤 마른 하늘에 날 벼락이라도 떨어진듯 굉음이 들려왔다.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자락에 위치한 '와우시민아파트' 15동이 붕괴되는 소리였다. 아파트가 준공된지 4개월 만에 발생한 붕괴 사고였다. 이 사고로 입주민 33명과 인근 판자촌 주민 1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을 입었다. 대형 건물이 많지 않았던 당시로선 큰 피해가 발생한 사고였다.
와우아파트는 1960년대 말 서울시가 추진한 무허가 건축물 정비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시민아파트'였다. 수도권으로 급속히 유입된 인구로 인해 서울 외곽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급증했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정비하기 위해 대규모 철거와 시민아파트 건설을 병행했다. '불도저'란 별명으로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은 이 같은 지시에 따라 산자락에 위치한 국유지를 시민아파트로 탈바꿈 시켰다.
문제는 짧은 공사 기간과 비용이었다. 단기간에 대규모 건설 작업이 이뤄지는 가운데 비용 절감을 위해 시공 과정 전반에 무리한 압박이 가해졌다. 당시 서울시는 낮은 단가에 입찰하도록 요구했고 거부할 경우 향후 관급공사 수주에서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암묵적 방침이 있었다. 이로 인해 시공사는 공사비를 원가 이하로 책정했고, 시공 품질이 크게 저하됐다.
붕괴 사고가 발생한 와우아파트 15동을 포함해 13~16동 시공을 맡은 대룡건설은 이 구간을 무면허 하청업자에게 재하도급했다. 공사비 일부는 리베이트로 빠져나갔으며, 구조물의 핵심 자재인 철근은 필요한 양의 10분의 1 수준으로 투입됐다. 시멘트에 불순물이 섞였고, 일부 공정에는 하수도가 포함된 물이 사용됐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지반 보강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와우아파트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구조적 부실이었다. 와우아파트는 암반이 아닌 연약한 토사 위에 세워졌으며, 지반 보강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겨울철에는 얼어붙은 땅이 하중을 간신히 지탱했지만, 해빙기가 되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건물이 붕괴됐다. 당시 언론기사에서 사고 생존자는 "갑자기 방바닥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아 눈을 떴는데 아파트가 무너졌다"고 전했다.
사고 이후 문제의 시공업자가 맡았던 13, 14, 16동도 이후 철거됐다. 구조물 자체의 콘크리트 강도가 낮아 철거 작업 또한 쉽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고로 서울시에 있던 시민아파트에 대한 안전 점검이 실시됐는데 434개 동 중 80%에 달하는 349개 동이 보수가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 사고를 계기로 정부는 시민아파트 계획을 중단하고, 기존 판자촌을 정비하는 방식 대신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시범아파트 건설로 주거정책 방향을 전환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그 첫 사례로, 이후 대규모 아파트 단지 개발의 전형이 됐다. 이후 지어진 시범아파트들은 안정성을 강화하고 주거 환경을 개선해 오히려 '고급 주거지'로 인식될 정도였다.
현재 사고 현장인 와우아파트 부지는 와우공원으로 조성돼 있으며 붕괴 사고를 알리는 기념 동판이 설치돼 있다. 현재까지 서울 시내에 남아 있는 시민아파트는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1968년 서울 중구에 지어진 회현시민아파트만 남아있다. 다른 시민아파트들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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