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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윤석열의 파면으로 대통령기록물의 행방이 중요해졌다. 대통령기록물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다. 정권의 작동 방식과 책임을 드러내는 핵심 증거다. 대통령기록물에는 공적 가치가 높은 대통령의 국정수행과 관련된 정보가 담기고, 정권의 실책과 실정, 더 나아가 비위에 해당하는 내용도 포함된다.
특히 위법한 비상계엄 선포로 파국을 맞은 윤석열 정부이기에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는 자료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12·3 비상계엄'부터 '명태균 게이트', '이태원 참사', '채 해병 수사 외압', '김건희 여사 리스크'까지, 주요 현안에 당시 정권이 어떻게 개입했고, 또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남아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자료가 온전하게 유지될 확률은 낮고, 은폐가 예상된다.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을 염두에 두지 않은 현행 법 규정의 미비점을 '최대한'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기록물 '부실 이관' 불가피... 마구잡이 은폐 우려
지난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윤석열 탄핵 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파면을 선고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즉각 종료됐고,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대통령기록물법)에 따라 윤석열 정권이 생산한 대통령기록물은 늦어도 6월 중엔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될 전망이다.
정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선 기록물의 온전한 이관이 필수다. 이를 위해 대통령기록물법은 대통령기록관에 사전 준비기간을 부여하고 있다. 대통령기록관은 대통령 퇴임 1년 전부터 기록물을 직접 확인하고, 목록화하는 등 이관 준비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통령기록관은 이관 과정에서 기록물이 누락되거나 잘못 분류되는 등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또 자료의 존부를 미리 파악해 대통령이 퇴임 직전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를 폐기하는 등의 '불상사'도 막을 수 있다.
이 사각지대는 대통령실 측이 자료를 은폐하거나 빼돌릴 기회로 작용하기 충분했다. 물론 국가기록원이 지난 1월 15일, 12·3 비상계엄 관련 기록물의 폐기 금지를 결정하긴 했지만, 이미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로부터 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그사이 대통령의 파면을 우려한 대통령실 공무원들이 범죄 정황이 담긴 기록물을 폐기했을 수 있다. 더군다나 '김건희 리스크', '명태균 게이트' 등 윤석열 정권의 다른 의혹들은 폐기 금지 대상도 아니었다.
대통령기록관은 오늘(9일)부터 대통령실과 국가안보실, 경호처를 비롯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와 같은 대통령 자문기관 등 28곳에 대한 현장점검에 들어갔다. 대통령기록물 이관을 위해서다. 그러나 당초 1년이었던 기록물 이관 작업 기간은 대통령 파면에 따라 단 2개월로 축소됐다. 차기 대통령 선거일인 오는 6월 3일까지 이관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 역대 정권에 비추어 보면,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기록물도 최소 5백만 건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자료는 많은데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니, '부실 이관'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또 폐기된 자료가 있다 해도 미처 파악 못 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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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기록물 봉인 권한', 즉 대통령지정기록물 제도도 손질이 시급하다. 제도의 도입 취지와 달리 권력의 민감한 정보를 장기간 은폐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대통령이 파면되는 극단적 상황에서는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정기록물 제도는 대통령이 특정 정보를 감추게 하기 위해 도입한 게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후대를 위해 가급적 기록을 남기도록 유도하는 게 본래 목적이었다. 2000년대 초까지 만해도 대통령실에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 구두 지시나 쪽지 보고, 밀실 결정 등이 만연했다. 심지어 몇몇 공무원은 대통령 퇴임 전 자료를 폐기하거나 개인 보관용으로 반출도 했다. '남기고 싶은 기록'만 남기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2007년 대통령기록물법을 제정하며 지정기록물 제도를 만들었다. 법 제정 당시 대통령실에서 기록연구사로 일했던 조영삼 전 서울기록원장(뉴스타파 전문위원)은 도입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록을 생산해 놓고 없애거나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너희가 혹시 나중에 이 기록으로 인해 문제나 논란이 생길 거를 수십 년 동안은 보호해 줄 테니까 기록을 없애지 말고 보존해 이관하라'는 거죠. 아이러니하지만 대통령지정기록물 제도는 기록 권장 제도입니다. 그러니까 지정기록물 제도의 목적은 기록의 비공개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대통령기록관에 기록을 오게 할 것인가'가 본질적인 목적인 거죠.결국 제도의 도입 취지를 생각하면, 지정기록물 지정은 최소한도 내에서 행사돼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게 현실이다.
- 조영삼 / 전 서울기록원장(뉴스타파 전문위원)
문재인 정부도 '2020년 서해 피격 공무원 사건' 자료 거의 전체를 지정기록물로 봉인해 대통령기록관에 넘겼다. 법원이 "군 기밀을 제외하고 공개하라"고 판결했지만 아직 유족들은 자료를 보지 못했다.
이렇듯 지정기록물 지정 권한이 오남용되지만, 법에는 아무런 견제 장치가 없다. 대통령기록물법상 지정기록물이 될 자격이 있는 기록물은 모두 6가지 유형인데, 이들 유형에 맞게 지정이 이뤄졌는지 심의·자문하는 절차는 없다. 심지어 어떤 기록물을 무슨 기준으로 지정했는지 목록조차 공개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마음대로 지정해도 제지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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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악용되는 지정기록물 지정 권한은 대통령도 아닌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그대로 '승계'된다. 윤석열이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지금, 한덕수 권한대행(국무총리)은 대통령기록물 이관 과정에서 지정기록물을 지정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기록물법에는 권한대행의 권한 범위와 한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국가기록원도 이미 권한대행의 지정기록물 지정이 가능하다고 인정한 상황이다.
헌법 71조는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통령기록물법에 따른 대통령지정기록물 지정 권한이 있다고 해석된다. 18대 대통령(박근혜) 탄핵 결정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지정기록물을 지정한 사례가 있다.그러나 권한대행은 지정기록물을 지정해선 안 된다. 헌법에 맞지 않다. 권한대행은 대통령 궐위 시 공석을 메꾸는 '임시직 관리인'에 불과하다. 대통령의 권한은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는 헌법 조항에 의거해 부여된다. 선출도 안 된 권한대행이 대통령과 동일한 권한을 행사할 순 없다. 권한대행은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과 대법관, 장관 등도 임명해선 안 된다는 게 헌법학계의 주류 해석이다.
- 국가기록원 유권해석 / 2025.3.17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 질의
그 어떠한 경우든 간에 대통령 권한대행은 일시적 대행에 불과하며 하루속히 정식 대통령에게 직무를 넘겨야 하므로 권한대행이 정식 대통령과 동일한 권한을 가질 수 없다..(중략).. 권한대행의 본질에 비추어 최소한의 소극적인 책임과 관리에 무게중심이 실려야 한다. 예컨대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관,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의 임명과 같이 사법권의 구성에 관한 권한은 권한대행의 권한 밖이라고 봐야 한다. 개각 등 행정부 내의 최고위직 공직자에 대한 임면권의 행사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특히 국가의 중요한 어젠다 중에서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은 가급적 결정을 자제하는 게 바람직하다.지정기록물 지정은 최장 30년, 정권이 5번 바뀌어도 봉인을 풀 수 없는 '비가역적 조치'다. 고위공직자 임명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상황에서 그보다 훨씬 강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권한대행이 마음껏 행사해선 안 된다.
- 헌법학 (법문사, 2022, 성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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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권한대행은 대통령의 파면 사유 혹은 여타 범죄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기록물 봉인 권한을 줘선 안 된다. 한덕수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파면은 해당 대통령과 정권이 심대한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뜻이다. 윤석열은 12·3 계엄과 관련해 헌법·법률 위반이 인정돼 파면됐고, 대통령으로서 권한을 상실했다. 지정기록물 지정 권한도 소멸했다.
국무총리나 국무위원들도 대통령의 위법 행위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설령 파면 사유가 된 위법 행위에 직접 가담하진 않았어도,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으로 그동안 수사·재판을 피해오던 여러 비위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됐을 수 있다. 특히 파면 이후 대통령의 범죄 혐의에 대한 수사가 본궤도에 오른다는 점에서 권한대행의 기록물 봉인과 시기상 겹칠 수밖에 없다.
한덕수 권한대행은 12·3 계엄 선포 과정에 직접 연루됐고, 현재 내란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피의자이기도 하다. 아직 자신의 기소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정기록물 지정은 그 자체로 이해충돌 소지가 있다. 대통령기록물을 봉인한다며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숨길 수도 있다. 자신을 임명해 준 대통령과 '특수관계'를 고려해, 편향적 조치를 할 수도 있다. 실제 한 권한대행은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의결된 이후, 국회 몫 헌법재판관 3명을 계속 임명하지 않아 탄핵 심판을 지연시키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윤석열 파면 이후인 지금은 '윤석열의 친구'를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으로 지명하며 '모순적 월권 행위'라는 질타까지 받는다.
그러므로 파면된 정권의 국무총리, 특히 한덕수가 권한대행으로서 대통령기록물을 봉인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 주범이 수사·재판을 받고 있는데, 공범·방조범일 수 있는 자에게 증거보관소 열쇠를 맡기는 꼴이다.
권한대행의 '마구잡이' 지정기록물 지정 가능성
권한대행이 그 내용이나 중요성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록물을 무분별하게 봉인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보통 권한대행을 맡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와 각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감독'하는 직책이다. 대통령 직속인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처 등 기관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통령기록물 중 거의 전부는 바로 이들 대통령 직속 기관에서 생산된다. 국무총리가 대통령기록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다.
또 국무총리는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하지 않는다. 한덕수 총리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로 노무현부터 문재인까지 각 정권에는 3명 이상의 총리가 있었다. 대통령에 비해 임기가 짧은 국무총리가 대통령기록물의 경중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더 우려되는 상황도 있다. 장관이 권한대행으로서 지정기록물을 지정하는 것이다. 최상목 기재부장관은 한덕수 총리를 대신해 지난해 12월부터 약 3개월간 권한대행을 맡았다. 만약 한덕수에 대한 탄핵이 인용됐다면, 현재 최상목이 지정기록물 지정 권한을 가졌을 것이다. 평소 직무 범위나 임기 면에서 장관은 총리보다도 대통령기록물에 대한 이해가 박약할 것으로 보인다. 최상목은 윤석열 탄핵소추안 가결 7개월 전 장관이 됐다.
정보의 부족과 불확실성이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하게 만든다는 건 행동경제학의 오랜 결론이다. 권한대행은 잘 모르는 기록물에 대해 공개보다는 일단 숨기고 보는 '보수적 결정'을 내리기 쉽다. 조영삼 전 서울기록원장(뉴스타파 전문위원)도 비슷한 지적을 한다.
대통령지정기록물 유형 중에는 "대통령의 정치적 견해나 입장을 표현해 공개될 경우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기록물"이 있습니다. 이런 건 대통령이 본인의 생각이니 스스로 판단해 결정하는 겁니다. 권한대행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또 권한대행으로선 상관의 정치적 입장을 자신이 직접 외부에 공개하는 게 부담스러우니 일단 봉인하지 않을까요.
- 조영삼 / 전 서울기록원장(뉴스타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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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박근혜 탄핵 당시 대통령기록물의 무단 폐기 및 부실 이전, 무분별한 지정기록물 지정이 논란이 됐다. 이관 과정에서 누락된 기록물들은 청와대 문서함 안에 그대로 쌓여 있었고, 문재인 전 대통령 취임 이후 발견됐다. 외교·안보상 기밀도 아닌 세월호 참사 기록물 등이 지정기록물로 봉인됐다.
그때 대통령기록물법을 고쳤어야 했지만, '설마 또 파면되겠어'라는 사회적 낙관 속에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 국회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법에 대통령 탄핵 관련 규정을 신설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8년 만에 두 번째 대통령 파면을 마주했고, 법을 제때 고치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세월호 기록물 봉인으로 참사 발생 1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참사 당일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처럼, 윤석열 정권의 '진실'에 대해서도 비슷한 미래가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이제라도 현실을 반영해 법을 개정해야 한다. 먼저 대통령 직무정지 기간에도 대통령기록관이 대통령 보좌·자문기관들을 상대로 기록물의 폐기·재분류·이동 금지를 요구하고, 확인 및 점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의 파면을 예상해 미리 기록물을 폐기하거나 빼돌리는 것을 차단할 수 있고, 기록물을 꼼꼼히 확인하며 이관 준비를 할 수 있다. 물론 탄핵이 기각되면 기록관은 헛일을 한 셈이겠지만, 이번처럼 4개월 가까이 허비하는 것보다는 낫다.
또 대통령의 지정기록물 지정 권한에 대한 견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지정기록물 지정 절차를 세분화하고, 지정이 완료되면 지정 절차와 기준,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 지정 과정에서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와 같은 중립적 기관의 자문·심의를 받도록 하는 대안도 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지정기록물을 지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이미 관련 논의가 진행된 적도 있다. 2018년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관리 혁신TF는 대통령 유고 시 권한대행이 아닌 대통령기록관에 지정기록물 지정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래야 중립적인 지정이 가능하다는 이유였다.
다만 대통령기록관이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된 조직이 돼야 한다고 전제를 달았다. 현재 대통령기록관은 행안부 소속으로 대통령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 TF는 최종보고서에서 "대통령기록관은 행정안전부 소속인 국가기록원의 2차 소속기관으로서 낮은 위상과 권한 미비로 전문성에 기반해 소관 업무를 정치 중립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며 "대통령기록관 조직을 행정안전부(국가기록원)로부터 독립시켜 최소한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적었다.
지난 7일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대통령기록물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의 취지와 내용은 대통령 탄핵·파면 사태를 고려한 법의 현실화다. 다른 의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하나둘 법률 개정안을 내놓고 있다. 늦었지만 국회는 하루빨리 법 개정 논의에 착수해야 한다.
뉴스타파 홍주환 thehong@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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