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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교제폭력을 휘두른 전 연인의 집에 불을 내 숨지게 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40대 여성이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됐다. 그러나 여성단체들은 “항소심 재판부가 교제폭력 피해를 참작해 일부 감형하긴 했으나 범행 당시 (반복된 교제폭력으로 인해 피고인이) 심신미약 상태였을 가능성을 부정하고 피고인을 살해하려는 고의가 있다고 인정하는 등 1심 판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광주고등법원 전주재판부 형사1부(재판장 양진수)는 9일 전 연인 ㄱ 씨의 집에 불을 내 전신 화상 등으로 숨지게 한 혐의(현주건조물방화치사)로 기소된 김은지(가명·43)씨의 항소심에서 원심(징역 12년)을 파기하고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피고인 쪽은 “살인의 고의가 없었으며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로 정당방위 혹은 과잉방위(정당방위 수준을 넘지만 정황에 따라 책임 감경되거나 면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사건 당시 피해자(ㄱ)는 술에 만취해 잠들어 있었을 뿐 피고인(김은지)에게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피고인이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한 유일한 방안이 피해자의 생명을 앗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는지 의문”이라며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피해자가 (사건 당일) 계속해서 (김은지) 목을 조르는 등 폭행했다 하더라도 그런 폭행이 피해자가 자고 있던 주택에 불을 질러 사망에 이르게 한 행위는 소극적 방어가 아닌 능동적인 공격”이라며 과잉방어로도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만 “의료 기록을 보면 피고인의 (교제폭력 피해) 상태가 심각함을 알 수 있다”는 점, 피고인에게 ㄱ씨에 대한 양가감정이 존재함을 짚으며 살인의 ‘확정적 의도’가 아닌 ‘미필적 고의’(적극적으로 의도하지 않았으나 사망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것)로 인정해야 한다며 형을 감경했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 이유를 설명하는 데 20분가량을 할애했다.
앞서 한겨레가 1심 판결문과 수사·재판 기록, 112신고 내역 등을 살핀 결과 김은지씨는 ㄱ씨와 교제를 시작한 2019년부터 5년 가까이 교제폭력을 겪으며 얼굴 부위를 집중적으로 맞아 망막이 손상되고 중증 우울증, 불안 장애, 비기질성 불면증 등 정신과적 질환을 얻는 등 여러 피해를 입었다. 같은 기간 경찰에 31차례 신고(고소 포함)로 피해 사실을 알리기도 했으나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특히 이 사건은 ㄱ씨가 김씨로 칼로 위협하고 담뱃불로 다치게 하는 등 특수상해·상해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살다 출소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2024년 5월10~11일) 발생했다. ㄱ씨는 김씨를 집으로 불러 술을 마시며 폭력을 휘둘렀는데, 휴대전화를 빼앗긴 상태였던 김씨는 외딴 집에서 벗어나려 구조를 요청하고자 불을 냈다는 입장이다.
9일 오전 전주지방법원 앞에서 ‘군산 교제폭력 정당방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효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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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재판부는 단 두 차례 공판 뒤 양형 사유에 교제폭력 피해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뒤 호남여성시민들의 모임 ‘비호’ 등 전국 34개 단체는 ‘군산 교제폭력 정당방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꾸려 시민들의 선처 탄원 서명을 받는 등 활동을 이어왔다.
공대위는 2심 선고 직후 전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2심은) 1심과는 달리 피고인이자 교제폭력 생존자의 방어권을 보장하고 사건의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하겠다며 형식적·절차적 노력을 기울이는 듯했고, 교제폭력을 참작할 만한 동기로 인정해 일부 감형했다”면서도 “결과적으론 살인하려는 고의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등 1심 판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항소심 판결이 원심보다 나아진 측면이 없진 않으나, 교제폭력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는 뜻이다. 피고인 쪽 이한선 국선변호사는 “피고인(김은지)과 상의해 상고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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