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새로운 '먹거리 산업'으로 거론되지만, 불확실성도 여전한 한국 바이오 산업. 바이오 분야 '1호 교수 창업자'이자, 지난 27년간 글로벌 수준의 과제에서 성패와 영욕을 경험한 김선영 교수가 우리 산업 생태계의 이슈와 문제점을 진단하고 세계 진출 방안을 모색한다.교수도 못되고 쫓겨난 기술 개발자
창업한 회사도 3년 만에 문을 닫고
2023년 노벨상으로 겨우 위로받아
창업한 회사도 3년 만에 문을 닫고
2023년 노벨상으로 겨우 위로받아
카탈린 카린코(왼쪽)와 드루 와이스만. 김선영 교수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 30여년간 과학기술 사업화에 깊숙이 관여하며 알게 된 의외 사실들이 꽤 많다. 과학적 우수함이 의약 개발 성공으로 연결될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 예상보다 일찍 과학보다는 다분야 전문성과 인적자원 관리 능력이 중요해진다는 점, 적지 않은 경우 시운(時運)이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 등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COVID-19 백신으로 잘 알려진 mRNA 기술 개발에 얽힌 이야기, 다음 연재에는 백신 개발사 2곳 즉 바이오엔테크와 모더나 사례가 주는 시사점을 살펴볼 것이다.
mRNA를 세포에 주입, 생물학적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은 1989년 미국 썰크연구소의 인더 버마 연구실이 밝혀냈다. COVID-19 사태가 터지기 30년 전 일이다.
하지만 mRNA는 매우 불안정한 성질과 원치않는 면역반응도 유발 가능성 때문에 실용적 개발은 답보 상태였다. 10여년이 지나서야 몇개 스타트업들이 생겨났으나 대부분 도태됐다. 1997년 가장 먼저 생긴 mRNA 전문 회사는 -추후 아르고스 쎄라퓨틱스(Argos Therapeutics)로 개명한 – 메릭스 바이오사이언스(Merix Bioscience)였다. 하지만 개발한 암백신이 임상시험에서 실패하면서 사라졌다. 유전자 치료제를 개발하다가 mRNA 분야에 뛰어든 바이칼(Vical)은 mRNA를 생체 내로 전달할 수 있는 전달체를 찾지 못해서 포기했다.
카리코와 와이스만은 본인들의 발명을 실용화하기 위해 2006년 알앤에이알엑스(RNARx)라는 스타트업을 설립했다. 그러나 자금을 얻지 못해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자본들이 이 기술을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좋은 과학자였으나 아직 유명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7년, 38세의 와이스만이 펜실바니아대 교수로 왔다. 미국 NIH의 파우치 연구실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온 와이스만은 RNA 백신에 관심이 많았다. 온지 얼마 안 돼 복사기에서 문헌을 복사하던 그는 우연히 42세의 카리코를 만났다. 카리코는 RNA 합성에 전문성을 가졌던만큼 이 만남은 즉각적으로 공동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들은 8년 후인 2005년 mRNA의 한계를 극복하는 기술을 발표했다.
와이스만은 카리코에게 실험실 공간과 급여를 제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교수들은 카리코 같은 연구원을 동료라기보다는 아래 사람으로 간주한다. 논문에서 저자로서의 권리도 경감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와이스만은 카리코를 동료로 대했고 인간적으로도 존중해 줬다. 한마디로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중대한 업적에도 불구, 카리코는 끝내 교수직을 받지 못했다. 24년 동안 일하던 펜실바니아대를 2013년에 떠나 독일 바이오엔테크로 향했다. 그 후 COVID-19 백신 개발로 주목을 받게 된 mRNA 덕분에 2023년에는 와이스만과 함께 노벨상을 받았다. 어색한 영어 발음, 헝가리 이민자, 여성 등 차별을 유발하는 온갖 요소를 갖췄던 슬라빅 과학자의 인간 승리였다.
김선영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