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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6 (토)

    이슈 초중고 개학·등교 이모저모

    "입학 문의 빗발치는데…" 싹둑 잘린 예산에 '무지개학교' 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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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배경청소년 가르치는 '레인보우스쿨'
    "한국 낯설어하는 아이들 정착에 큰 역할"
    올해 예산 7억 이상 삭감 "간식비 없어요"


    한국일보

    13일 경기 화성 온누리다문화평생교육원 '레인보우스쿨' 수업에서 이주배경청소년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어 발표하고 있다. 최현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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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러시아, 키르기스스탄···.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아이들 6명이 수업이 시작되는 오후 3시에 맞춰 출석했다. 간식과 휴대폰을 교실 앞 책상에 반납하더니, 뒤편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들고 자리에 앉았다. 13일 경기 화성 온누리다문화평생교육원 '레인보우스쿨' 수업의 규칙은 간단했다. 유창한 러시아어 대신 서툰 한국어로 소통하기.

    화면에 공과 상자 모형이 떴다. 한국어 강사 이혜영(54)씨가 유인물을 나눠줬다. "공이 상자 어디에 있어요? 문장으로 적어보세요." 말하지 말고 쓰라고 했지만 디야스(가명·12)는 화면이 보이는 족족 정답을 말했다. "공이 상자 안에 있어요." "이번엔 오른쪽에 있어요." 이씨가 오른손 검지를 입에 갖다댔다. "디야스, 쉿!"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건 디야스뿐만이 아니다. 이번엔 꽃의 종류를 말해보는 시간.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해하던 엘미라(가명·12)는 휴대폰을 가져와선 등하교길에 찍어놓은 꽃 사진을 보여줬다. "이건 튤립이네요." 이씨가 답을 일러줬다. 엘미라는 가끔 '보디 랭귀지'도 동원했다. 무궁화를 말하고 싶을 땐 얼굴을 가리면서 놀이하는 시늉을 했다. "우리나라 꽃이에요. 노래 있어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외국인 주민 전국 2위 화성



    한국일보

    13일 경기 화성시 발안만세시장의 한 가게에서 열대 과일을 팔고 있다. 최현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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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인보우스쿨은 이주배경청소년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 등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다. 이주배경청소년은 부모나 본인이 한국으로 이주한 9~24세 아동 및 청소년을 일컫는 말이다. 2023년 국민통합위원회 권고 이후 '다문화청소년'을 대체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레인보우스쿨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방과 후 학교'다. 외국인 주민 비율이 높은 지역의 민간 복지관이나 문화센터가 여성가족부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 한국일보가 방문한 경기 화성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외국인(2023년 기준 7만6,711명·행정안전부)이 산다. 실제 교육원이 있는 향남읍 발안만세시장엔 아시아 곳곳의 현지 식재료들이 지천이다. 정육점에선 이슬람 율법이 허용한 할랄 인증을 받은 고기를 팔고, 과일가게 매대에선 코코넛 같은 열대 과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이들 벽 허물고 다가와 줄 때 감동"



    한국일보

    이혜영씨가 경기 화성 온누리다문화평생교육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최현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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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인보우스쿨에서 3년째 교편을 잡고 있는 이씨는 가장 뿌듯한 순간으로 서먹해하던 아이들이 먼저 다가와 줄 때를 꼽았다.

    외국에서 살다가 부모의 취업이나 결혼으로 갑자기 이주해 온 아이들은 적응을 어려워 한다. 자발적으로 온 게 아닌 데다, 예민한 시기에 환경이 갑작스럽게 변해서다. 그러나 몇 개월 지나면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대뜸 궁금한 걸 저한테 물어봐요. '선생님, 어느 나라에 가보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요. '아, 나에게 관심이 있었구나, 그런데 말을 못하는 거였구나' 깨달았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푹 빠진 이씨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다"고 웃어보였다.

    작년 21곳→올해 13곳 '반토막'



    한국일보

    '레인보우스쿨' 학생들이 지난해 5월 경기 화성시 온누리다문화평생교육원에서 태권도 승급 심사를 보고 있다. 교육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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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인보우스쿨은 이주배경청소년의 한국 정착에 디딤돌 역할을 하지만 오히려 존폐 위기에 몰려 있다. 줄어든 예산 때문이다. 여가부는 사업 중복 등의 이유로 올해 관련 예산을 지난해 31억6,800만 원에서 7억 원 이상 깎인 24억2,800만 원만 편성했다. 지난해 이주배경청소년이 19만3,814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는데 관련 정책은 역행한 것이다.

    예산 삭감의 여파는 바로 나타났다. 레인보우스쿨은 전국 21곳에서 13곳으로 거의 '반토막' 났다. 3차례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고 여가부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성과를 냈던 화성 레인보우스쿨은 살아남았지만, 형편이 넉넉지 않은 건 매한가지다. 2020년부터 레인보우스쿨을 운영하고 있는 김정희 원장은 "정말 살얼음판을 걷듯이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올해엔 한 명당 3,000원인 간식비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김 원장이 남편과 지인들에게 받은 후원금, 온누리교회의 지원으로 겨우 충당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막막하다. 김 원장은 "지금도 입학 문의가 물밀듯이 들어온다"며 "더 많은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만 그러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최현빈 기자 gonnal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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