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 ‘마의태자’로 데뷔, 서도소리 명창 김추월로도 활약
1934년 눈을 가린 채 신분까지 감춘 복면 여가수가 콜럼비아 레코드로 데뷔했다. 예명도 '미스 코리아'라 흥미를 더했다. 신비주의 마케팅의 원조격이었다. '미스 코리아'는 서도소리 명창 김추월의 '부캐'였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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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찬! 환호! 미스 코리아’
호들갑스러운 문구와 함께 음반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콜럼비아 레코드가 그해 9월 출시하는 신보 ‘마의태자’ ‘오-내 사랑’을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는 신라가 망하매 경순왕의 태자가 신(新)왕조에 대한 치욕감과 구(舊)국가에 대한 부흥 계획을 품고 금강산에 가서 은복(隱伏)하였다는 눈물겨운 마의태자의 사적을 시인 유도순씨가 그림 같은 시로 읊은 것입니다.’(조선일보 1934년 8월19일)
콜럼비아 레코드는 1934년 9월 신인가수 '미스 코리아' 음반 '마의태자'를 내면서 눈 주위를 가리는 신비주의 마케팅을 펼쳤다. 예명까지 '미스 코리아'라고 써서 흥미를 더했다. 당시 음반에 실린 광고지./국악평론가 김문성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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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순, 김준영 콤비
‘마의태자’는 1930년대 대표적 작사가 유도순과 작곡가 김준영이 만든 신민요였다. 노래도 노래지만, ‘미스 코리아’란 예명으로 소개한 가수의 실체가 묘연했다. 음반 가사지에 실린 얼굴 사진에 눈 주위를 가린 ‘복면 가수’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 ‘신비주의 마케팅’이었다.
‘풀옷을 몸에 감고 금강에 해지우니/망군대 바위돌에 새긴 뜻 한숨지네’(1절) ‘면경대 맑은 물에 손씻고 일어나니/천리밖 경주성이 눈물에 어리운다’(2절)
조선일보 1934년8월19일자에 실린 '미스 코리아' 데뷔 음반 광고. '격찬! 환호! 미스 코리아'는 문구를 넣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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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9월 콜럼비아 레코드가 출시한 '마의태자' 유성기 음반. '미스 코리아'를 가수로 소개했다. /김문성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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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코리아’는 평양기생 김추월
지금도 ‘백두산타령’으로 불리는데, 민요가수 김세레나 음반에도 실려있다. 광복후 북한에서도 가사를 바꿔 불릴 만큼 인기다. ‘미스 코리아’는 1941년 예명을 ‘모란봉’으로 바꿔 ‘대동강 물결우에’를 발표한다. 이 음반에 ‘모란봉’을 ‘구(舊) 미스 코리아’로 설명하면서 둘이 같은 인물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비슷한 시기 나온 ‘궁초댕기’음반도 가수 ‘모란봉’을 ‘구명(舊名) 미스코리아’로 적었다.
‘미스 코리아’의 정체는 1990년대 들어 다시 한번 주목을 끌었다.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낸 ‘신범벅타령’ 음반 광고에 ‘김추월’이란 평양기생 사진이 실렸는데, 1934년 ‘마의태자’ 광고에 사용된 사진과 유사했다. ‘미스 코리아’가 김추월이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조선예흥사가 1940년6월 19~20일 저녁 부민관에서 주최한 제1회 조선음악전에 미스 코리아가 출연했다. 히트곡 '백두산 바라보고'를 불렀다. 조선일보 1940년6월20일자에 실린 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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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 출연 때 김추월 밝혀
김추월은 이날 강홍식, 전옥 부부와 함께 김준영이 작곡한 신민요 경복궁타령을 함께 불렀다. 반주는 DK오케스트라가 맡았다. ‘미스 코리아’란 예명으로 ‘복면가수’행세를 했으나 방송국 출연에선 본명을 쓸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이날 방송은 일본까지 중계됐다.
◇‘미스 코리아’는 부캐?
이때문에 데뷔초부터 신민요가수 ‘미스 코리아’가 서도민요 명창 김추월이란 사실이 어느 정도 알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신민요는 ‘미스 코리아’, 민요는 ‘김추월’로 활동했기에 두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여겼을 법하다. 일종의 ‘부캐’전략인 셈이다.
김추월은 1938년 5월3~4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전 팔도여류명창대회에 평안도를 대표한 명창 고일심 장학선 김벽도 김춘홍과 출연, 서도소리를 불렀다.영변가 수심가 놀량사거리는 물론 의주 산타령 같은 희귀한 노래도 포함됐다. (조선특산품전람회 기념 전조선향토연예대회총관, 조선일보 1938년4월24일)
팔도여류명창대회는 조선일보가 1938년 혁신 5주년과 지령 6000호를 기념해 주최한 조선특산품전람회 부대행사로 기획해 열린 조선향토연예대회의 일부였다. 4월25일~5월8일 조선일보사 대강당에서 열린 조선특산품전람회는 10만명이 몰린 대규모 행사였다. 8도 여류명창들이 나선 부민관에도 엄청난 관객이 몰려들었다. 김추월은 얼굴이 알려진 대중 스타였을 것이다.
김추월은 라디오스타였다. 1940년 한해만 해도 경성방송국에 매달 출연, 서도소리를 불렀다.
1938년4월 부민관에서 열린 전조선팔도여류명창대회에 김추월은 내로라하는 명창들과 함께 나서 서도소리를 불렀다. 신민요가수 '미스 코리아' 는 민요 소리꾼 김추월과 동일인이었다. 조선일보 1938년4월24일자 기사. |
◇명창, 명인과 함께 부민관 공연 나선 ‘미스 코리아’
조선예흥사(藝興社)주최로 1940년6월19~20일 오후 7시반 경성부민관에서 열린 제1회 조선음악전(典)엔 ‘미스 코리아’가 출연했다. 정악전습소, 조선성악연구회, 조선무용연구소 등 전통음악, 무용의 주역들이 출연한 공연이었다.
이왕직 아악부원인 대금명인 김계선, 이왕직아악부 아악수를 지낸 명창 이병성 등 쟁쟁한 명사들이 나선 무대에서 ‘미스 코리아’는 신민요 히트곡 ‘백두산 바라보고’ ‘달 같은 님아’ 2곡을 불렀다.(향토음악의 정수 모은 의의 깊은 조선음악전, 조선일보 1940년6월19일, 조선음악의 정수!, 동아일보 1940년6월19일) ‘미스 코리아’가 음반처럼 복면을 하고 노래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없다.
◇두 사람 이력이 혼재된 네이버 ‘한겨레음악대사전’
‘미스 코리아’ 김추월은 이동백, 송만갑 제자였던 대구 출신 기생 김추월(1897~1933)과는 동명이인이다. 김추월은 대정권번, 한성권번에서 활동하다, 1933년 서른 여섯살에 모르핀 중독으로 사망했다.(여류명창김추월 객사, 조선일보 1933년2월22일)
일본축음기상회와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유성기 음반을 많이 남겼다. 이동백과 부른 ‘춘향전’, ‘육자배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한겨레음악대사전’은 두 명의 김추월 이력을 한사람 것으로 뒤섞어서 혼란을 준다.
대구 출신 명창 김추월의 객사 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33년2월22일자. 판소리명창 김추월은 서도소리 명인 김추월과 동명이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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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문화재 최창남의 스승
‘미스 코리아’ 김추월은 1963년 라디오방송에 출연, ‘미스 코리아’로 데뷔한 사연과 근황을 들려준 적있다. 국악평론가 김문성씨는 “국가무형문화재 선소리산타령 보유자 최창남(1935~2022)선생이 김추월에게 소리를 배웠다고 증언했다. 최 선생도 처음엔 스승이 다른 이름을 써서 그 김추월인지 몰랐던 듯하다”고 했다. ‘미스 코리아’, 김추월은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 타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자료
박찬호 지음,안동림 옮김, 한국가요사 1895~1945, 현암사, 1992
이동순, 한국 근대 가수 열전, 소명,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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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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