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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화초 향기롭고 솔은 푸르구나” 귀양 7년 만에 쉴 곳 찾다
<81> 다산 초당 입주 ◇귤동의 다산서옥 1808년 3월, 다산은 묵재를 떠나 귤동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문매반가와- 2019.09.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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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궁핍한 묵재 생활… 아끼던 조카까지 잃어
<80> 묵재를 찾은 손님과 정학초의 죽음 ◇묵재를 찾은 윤규렴 다산은 제자 이정의 집에 얹혀 산 1년 8개월간이 그다지 편치- 2019.09.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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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다산의 작은 쪽지 하나 버리지 않고 책으로 만든 제자
<79>정학연의 두륜산 기행과 묵재 시절 ◇산방 생활과 정학연의 두륜산 기행 1805년 10월 9일, 보은산 고성사로 올라온- 2019.09.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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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모르는 것을 물어라, 질문과 대답을 기록하라” 다산의 ‘문답 교육’
<78> 고성사에서의 겨울 나기와 문답식 학습법 ◇세 개의 ‘견월첩(見月帖)’ 1805년 4월 17일에 아암 혜장과 만난 이후- 2019.09.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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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다산과 혜장 스님 교유… 잊힌 차문화 중흥 기폭제가 되다
<77> 다산과 불교와 차 ◇강렬한 쏠림과 묵은 인연 다산이 만덕사에서 혜장과 만나 ‘주역’을 두고 하루 밤 토론을 벌인 뒤,- 2019.08.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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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종교와 나이 뛰어넘어… 다산, 진정한 교유 대상을 만나다
<76>만덕사의 새 주지 아암 혜장 ◇취해 살다가 꿈 속에 죽는 인생 제자 황상의 5촌 당숙인 황인태는 다산보다 나이가 16세- 2019.08.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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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생각지 않게 마음 맞는 벗 사귀었건만… 형님 걱정에 눈물 쏟다
<75> 보리자 황인태와 ‘황씨체화집’ 다산은 강진에 내려온 지 11개월 만인 1802년 10월에 제자를 받아 서당을 열었다.- 2019.08.1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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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제자 따라 맞춤형 수업 한 다산, 날 좋을 땐 제자들과 나들이
<74> 단계별 학습과 전공 구분 ◇학질 끊는 노래 스승의 ‘삼근계’를 받아 든 1802년 10월 17일 이후, 황상은 스승의- 2019.08.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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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내제자 뒀다" 소문에 자녀교육 부탁 이어져... 주가 골방이 서당으로
<73>사의재 서당 ◇아! 삼근계(三勤戒) 내제자 황상을 들인 뒤로 다산의 생활에 활기가 생겼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다가- 2019.07.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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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주막 앞서 공 차며 놀던 아이를 내제자로… 다산, 평생을 피붙이처럼 아껴
<72> 주막집 노파와 내제자 황상 ◇앵두와 죽순 1802년 여름, 현감 이안묵은 기어이 하찮은 꼬투리를 잡아서 다산을 상부에- 2019.07.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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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새 유배지 강진에는 다산을 노리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70> 강진 가는 길 ◇악연의 끝 자리 당시 다산은 10월 20일 밤에 체포되어 27일 옥중에 들어갔다가, 11월 5일에 강- 2019.07.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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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큰 서양 배로 조선 압박” 적은 작은 천 조각, 조정을 충격에 빠뜨리다
<69> 황사영 백서 사건 ◇황사영과 배론 토굴 황사영(黃嗣永ㆍ1775~1801)은 천재였다. 16세 나던 1790년에 진사시- 2019.06.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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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분노하다, 자조하다… 체념한 다산, 각종 저술 정리하며 마음 추슬러
<68> 장기(長鬐)의 노래 ◇흉몽 1801년의 신유박해는 정약종의 책롱이 발각된 것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어린 국왕을 끼고- 2019.06.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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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이렇게 끝날 줄 왜 몰랐을까요” 유배길 다산, 부친 묘소서 회한의 눈물
<67> 귀양지의 다산과 주문모 신부의 처형 ◇하담의 작별 인사 1801년 2월 29일에 도성을 떠난 다산은 3월 2일 유배길- 2019.06.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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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천주교회 거목들 줄줄이 처형… 다산은 검거 협조하고 가까스로 목숨 구해
<66> 처형과 유배 ◇추국청의 두 형제 다산이 곤장 30대를 맞고 실려 나간 이튿날인 1801년 2월 12일, 책롱 사건의- 2019.06.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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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정조 국상’ 끝나자 결국 체포된 다산, 곤장 30대 맞고 실려 나가
<65> 쓰러진 거목과 굳게 닫힌 문 ◇영원한 작별과 재앙의 기색 1800년 6월 28일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 소식이 조야를- 2019.05.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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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운명의 1800년’ 정조 급서…. 다산, 세상과 통하는 모든 문 닫히다
<64> 한양 복귀와 암운 ◇연암 박지원과 김건순의 만남 1796년쯤 20세 초반의 젊은이가 연암 박지원을 불쑥 찾아왔다. 연- 2019.05.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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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정약종이 회장 맡은 명도회, 천주교 신자를 급속히 늘려나가
<63> 밀사와 밀정, 그리고 명도회 ◇주문모 신부의 행보 1795년 5월 11일, 다산의 도움으로 계동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던- 2019.05.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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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표 한 줄에 가호별 토지부터 솥의 개수까지… 곡산 전체 손금 보듯
<62> 침기부 종횡표의 위력 ◇정당에 내걸린 곡산 지도 곡산부사 부임 직후 다산의 잇단 선정(善政)은 백성들의 신망과 기대를- 2019.05.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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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다산 아직 천주학 못버렸다” 중신 반대에 눈물 삼키며 다시 지방으로
<60> 곡산부사로 다시 떠나다 ◇빗나간 승부수 다산의 ‘변방소’는 어쨌거나 단연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고위직의 관리가 자신- 2019.04.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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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천주교 틀에 가두는 사슬 끊어달라” 탄원에 면죄부를 받다
<59> 회심의 승부수 ‘변방소’ ◇정조의 집착 다산은 1796년 11월 16일에야 마침내 규장각 교서관으로 임금의 부름을 받- 2019.04.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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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천주교 배신” 낙인 찍힐까 벼슬길 복귀 거부
<58> 차려진 밥상을 걷어찬 다산 ◇정조의 계획 정조는 1795년 12월 20일에 이정운(李鼎運)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했다.- 2019.04.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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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퇴계를 따르겠다” 취지 반성문 작성… 좌천 5개월 만에 서울로 돌아와
<57> 또 하나의 반성문, 도산사숙록 금정에서의 세 번째 미션 이존창 검거와 봉곡사 강학회를 마친 다산은 마지막 하나의 미션- 2019.04.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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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열에 두셋만 믿을 만하다” 혹평하면서도 성호 문집 정리 밀어붙여
<55> 성호에 대한 다산의 평가 ‘서암강학기’ 참석자 명단에 누락된 이승훈 한편 ‘서암강학기’에 실린 13명의 참석자 명단에- 2019.03.2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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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남인 학자 13명 봉곡사서 열흘간 학술 세미나… ‘가례질서’ 초고 정리
<54> 봉곡사에서 열린 성호 강학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1795년 10월에 이존창의 검거가 이루어지자, 숨을 돌린- 2019.03.1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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