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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 (일)

조국을 위해서 그들은 중국 국적을 택했다 [박종인 기자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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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상해 임정요인의 국적 검증

1935년 11월 상해 임시정부 한국국민당 창당 기념사진. 왼쪽부터 송병조, 조완구, 김구, 이동녕, 조성환, 이시영, 차리석. 1934년 상해 주재 프랑스영사관 자료에 따르면 이 가운데 김구를 제외한 나머지 요인들은 모두 국적이 중국이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임정요인들은 활동 중심지인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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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치권에서 상해 임정 요인들의 국적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이들 국적이 한국이라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일본 혹은 중국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알아보았다. 결론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국적은 대부분 중국이었다.

조선 혹은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조선을, 조국을 위해 결정한 현실적 선택이었다. 독립을 위해 투쟁했지만 현실을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국외 왕래와 자녀 교육 문제 등으로 중국 국적을 얻거나 거류증을 발급받아야만 했다.(황선익,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삶’, 독립신문 4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2023년 6월)

식민 시대 조선인의 국적 문제

식민 시대 조선인의 국적 문제는 복잡했다. 1910년 강제 병합으로 조선은 국가로서 소멸했고, 조선인은 강제적으로 일본인이 됐다. 일본 국적법은 본인이 원할 때에는 일본 국적을 버리고 타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일본은 조선에 일본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대신 조선에는 대한제국 때 만든 ‘대한제국 내부 훈령 240호-귀화 한인의 정체성’을 적용했다. 조선 관습법에 따라 조선인은 국적 이탈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번 일본 국적을 받은 이상 조선인에게 국적 이탈은 불가능했다.

‘조선 관습을 존중한다’는 포장과 달리 여기에는 독립운동 특히 중국 대륙에서 벌이는 독립운동에 대한 경계와 감시 의도가 컸다. ‘그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하면 중국 영토에서 배일 운동을 일으켜 독립운동을 시도하더라도 단속할 방법이 없다.’(1925년 11월 조선총독부 외사과, ‘제51회 제국의회설명자료’. 엔도 마사타카, ‘호적을 통해서 본 국적’, 일본비평 29, 서울대 일본연구소, 2023, 재인용) 그러니까 대외적으로 조선인 국적은 일본이었지만 내부적으로 일본은 조선을 그들과 구분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이 만든 만주국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 국적이 큰 문제가 됐다. 수십 년째 땅을 개간하고 자리 잡았음에도, ‘일본 국적’ 조선인들이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땅을 빼앗기는 사례가 급증한 것이다.

1931년 독립운동가인 조선인 변호사 이인(李仁)은 이렇게 주장했다. ‘일본 인민이 미국에 입적해서 미국 사람 되는 것은 용인하면서 조선 사람이 중국 시민 되는 것은 왜 용인하지 않는가. 조선 사람은 일본 만몽 정책의 선구자다. 재만 동포 문제 해결은 국적법 적용에서 시작해야 한다.’(이인, ‘참변과 재만동포 문제’, 1931년 4월 ‘동광’ 24호) 현지 조선인 사회에서는 ‘일본 정부에 항의 차원에서 일제히 (일본) 국적을 벗어나기로 결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천인이 공명하는 탈적(脫籍) 운동’, 1923년 3월 ‘개벽’ 32호)

중국 상해, 1932년 윤봉길 의거

1932년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는 상해 한인들의 국적 문제를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일본은 사건 직후 상해의 한인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국적 취득 여부가 주요 쟁점이 됐다. 특히 안창호 체포 과정에서 국적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안창호 국적은 조선이나 일본이 아닌 중국이었다. 중국 당국은 안창호가 중국 국적법 제4조 1항에 의해 중국 국적을 획득했으니 재판 관할은 중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자기네 법과 대한제국 법에 따라 조선인은 국적 상실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다른 나라 국적 취득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이혜린, ‘1932년 일본의 재상해 한인 체포 활동과 프랑스 조계당국의 대응’, 사림 62, 수선사학회, 2017) 안창호는 결국 프랑스 자치 경찰에 체포돼 일본에 넘겨졌다.

도산 안창호가 발급받은 중국 여권. 출생은 강소성, 국적은 중화민국, 이름은 ‘安昌浩’가 아니라 ‘晏彰昊’로 적혀 있다. 조선(대한제국) 여권이 미국에서 거부당한 이후 안창호는 1923년 중국 국적을 취득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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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국적 취득과 정체성

안창호는 1902년 대한제국 외부에서 발급한 여행권(집조), 블라디보스토크 청국총영사관 발급 호조, 1924년 중국 상해에서 발급받은 호조, 1929년 필리핀 방문 때 사용한 중국 호조 등 최소 4종의 여행 증명서를 사용했다.(김도형, ‘도산 안창호의 ‘여행권’을 통해 본 독립운동 행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5)

안창호는 1902년 대한제국 여권인 집조로 미국으로 떠나 1907년 귀국했다. 1910년 4월 중국으로 출국한 안창호는 이후 러시아와 멕시코 등지를 순회하다가 1918년 미국으로 재입국했다. 그때 안창호는 대한제국 여권을 거부당했다. 나라가 없으니 일본 여권을 받아 오라는 것이다. 어렵게 여권 없이 입국 허가를 받은 안창호는 이후 거듭되는 미국 입국 거부에 1922년 중국 귀화를 신청하고 국적을 취득한 뒤 중국 여권을 발급받았다.

이런 사실은 윤봉길 의거 당시 안창호 변호인인 미국 변호사 노우드 알만이 장남 필립 안에게 보낸 편지에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안씨는 1933년 5월 19일 일본 당국이 참석한 자리에서 나에게 자신의 중국 귀화 증명서(취득 번호 8531)가 1923년 7월에 발급되었음을 확인했다.’(‘1932년 7월 21일 올만이 안필립에게 보낸 편지’, 독립기념관, 1-A00030-031)

안창호가 소지한 중화민국 여권에는 출생지가 강소성이고 국적은 중화민국으로 기재돼 있다. 안창호는 이름 한자도 ‘安昌浩’에서 ‘晏彰昊’로 바꿨다.

안창호가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게 중국 국적 취득은 생존과 활동을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을 뿐이다. 국적과 민족은 별도 개념이다.

와해된 임정 재건과 프랑스 영사관

윤봉길 의거가 터지자 일본은 대대적인 주모자 색출 작업에 돌입했다. 안창호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체포됐다. 당시 임정이 있던 상해 프랑스 조계지 프랑스영사관 보고서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거의 와해됐다가 1934년 남경에 자리 잡은 이후 이전 상태로 복귀됐다.(‘프랑스 외무부 문서 보관소 소장 한국독립운동 사료3’, 국가보훈부, 2016, p311, 166. 상하이 한인 단체 현황과 한인 활동에 관한 보고 1934년 6월 23일)

보고서에 따르면 상해 임시정부는 내각과 의정원으로 구성돼 있고 하부 조직에는 ‘남경한인군사학교’와 ‘대한교민단’이 있었다.(국가보훈부, 앞 책, pp.311~315)

1934년 6월 현재 임정 내각은 내무부장 조소앙, 외무부장 김규식, 군무부장 윤기섭, 법무부장 최동오, 재무부장 송병조가 파악돼 있다. 또 의회 격인 의정원 구성원은 김규식, 양기탁, 성주식, 송병조, 윤기섭, 조욱, 최동오, 문일민, 박창세, 신건제 등이다. 내각과 의정원이 일부 겹쳐 있다.

1934년 6월 23일 상해 프랑스영사관이 파악한 상해 체류 한인들 신상명세표. 왼쪽은 이름, 중간은 특이사항 및 주소, 오른쪽은 중국 귀화 증명서 유무 및 증명서 번호와 취득 날짜가 적혀 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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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관 보고서 끝에는 1934년 6월 현재 상해 한인들 신상 명세표가 첨부돼 있다. 표에는 이들 나이와 주소, 직업과 국적이 적혀 있다. 국적은 ‘중국 귀화 증명서 번호’와 취득 날짜로 표시돼 있다. 귀화 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프랑스어로 ‘없음(néant)’이라고 적혀 있다. 이 표를 근거로 임정 요인 국적을 짚어보자.

임정 조직과 국적

먼저 임정 내각이다. ‘내무부장 조소앙 중국, 외무부장 김규식 중국, 군무부장 윤기섭 없음, 법무부장 최동오 중국, 재무부장 송병조 중국.’ 다음은 의정원 구성원이다. 4명은 내각과 겹친다. ‘김규식 중국, 김철 중국, 문일민 중국, 박창세 중국, 성주식 없음, 송병조 중국, 신건제 없음, 양기탁 중국, 윤기섭 없음, 조욱 중국, 최동오 중국.’ 영사관이 파악한 의원 11명 가운데 8명 국적이 중국이다. 내각과 의정원을 통틀어 12명 가운데 9명이 공식적으로 중국 귀화인이다.

1934년 프랑스영사관 보고서에서 발췌한 당시 임정 내각 신상명세표. 위부터 내무부장 조소앙, 외무부장 김규식, 군무부장 윤기섭, 법무부장 최동오, 재무부장 송병조. 오른쪽에 'Neant'라고 표시된 군무부장 윤기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중국 귀화증명서 번호와 취득 날짜가 표시돼 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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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부 조직인 남경한인군사학교 간부 5명 가운데 교장 김구와 유동열을 제외하고 3명이 중국 귀화인이고 대한교민단 간부 7명 가운데 오영선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식적으로 중국 국적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영사관이 보고서를 작성한 1934년 6월 현재 임정과 하부 조직 요인 24명 가운데 18명이 중국인이다.

국적 선택에 일관된 원칙이 있는 게 아니었다. 개인 필요에 의해 누구는 중국, 누구는 조선 국적을 유지했다. 국가보훈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동으로 조사하고 수집한 이 자료는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공개돼 있다. 이 보고서는 맨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주요 임정 요인의 국적

1934년 6월 프랑스 영사관 보고서에는 민족주의 계열 한인 명단이 모두 83명 수록돼 있다. 이들 가운데 해방 때까지 잠시라도 임정에 가입한 사람은 38명이다. 이들을 중국 국적 취득 여부로 분류하면 이러하다.

먼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귀화인은 28명이다. 김규식, 김동우, 김두봉, 김정북, 김철, 김철남, 김홍서, 문일민, 박창세, 선우혁, 손두환, 송병조, 안공근, 안낙생, 안우생, 양기탁, 엄항섭, 이동녕, 이상무, 이시영, 장덕로, 조상섭, 조소앙, 조완구, 조욱, 차리석, 최동오, 한진교.

‘취득 번호 없음’으로 표시된 인물, 그러니까 중국 국적 취득 기록이 없는 인물은 10명이다. 김구, 성주식, 신공제, 안경근, 오영선, 유동열, 유진동, 윤기섭, 이웅, 황일청.

임정 요인 총 38명 가운데 28명이 공식적으로 중국 귀화인이었다. 안창호는 이 보고서가 나온 1934년에 조선으로 압송된 상태라 명단에 없다. 특히 양기탁, 조소앙, 김규식, 이동녕, 이시영 등 임시정부 핵심 요인이 모두 중국 국적을 얻었다. 조선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제적 활동과 신변 보호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고 독립운동을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김구 국적

이 1934년 프랑스 보고서에 김구(金九)의 중국 귀화 증명서 번호가 ‘없음’으로 표시돼 있다. 이에 따르면 최소한 1934년 6월까지 김구는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보고서는 ‘없다’는 뜻의 ‘Néant’ 옆에 ‘(?)’를 부기해 놓았다. 이 물음표가 뜻하는 바는 김구 연구가들이 판단해야 한다.

참고로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있는 이 보고서 국역본에는 ‘Néant(?)’가 ‘(?)’ 없이 단순히 ‘무’로 번역돼 있다. 역시 귀화증명서 부분이 ‘Néant(?)’로 표기된 김석이라는 인물은 제대로 ‘무(?)’로 번역돼 있다.

1934년 상해 프랑스영사관이 파악한 김구 신상명세. 중국 귀화증명서 번호와 취득날짜가 '없음(Neant)'으로 표시돼 있고 그 옆에 '(?)'가 부기돼 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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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본인이 쓴 ‘백범일지’에는 이런 기록이 보인다. ‘남경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할 때 남경 경비사령관 곡정륜이 “일본에서 대역 김구를 체포할 터이니 입적(入籍) 기타의 이유로 방해 말라 하기로’(‘백범 김구 전집1’,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대한매일신보사, p306).

'백범일지' 김구 친필본. 남경경비사령관이 전해준 일본영사 발언이 적혀 있다. "입적(入籍)을 핑계로 체포를 막지 말라"고 말했다고 김구가 적어놓았다. /‘백범 김구 전집1’(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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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본인이 언급한 ‘입적(入籍)’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귀화’를 뜻한다. 하지만 이는 일본 측이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어떤 핑계로든 김구 체포를 방해 말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김구 본인은 국적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안창호 케이스처럼 국적은 독립운동가 본인 신변 보장을 위해 필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숨길 일도 아니었다. 김구 국적은 판단 유보다.

국적과 정체성

국적 논쟁은 국적과 민족 정체성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무의미한 논쟁이다. 국적은 법적 지위를 의미한다. 민족 정체성과는 별개 개념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생존과 활동을 위해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민족으로서 정체성 포기가 아니다. 독립운동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앞에 언급한 독립운동가 이인의 말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드래도 표면적 외국인 됨에 불과하고 엄연한 조선 민족’(이인, 앞 ‘별건곤’ 기고문)이었다.

프랑스 영사관 관련 자료 다운로드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T8CiwNrFneW0-ypldOMcpeLQwIeteXNa?usp=sharing

[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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