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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사람들의 희생을 밟고 나아가는 ‘핵 진흥’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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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탈핵공동행동 등 대전 환경단체들이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14주기인 지난 11일 오전 대전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권의 핵 진흥 정책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단체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수명 다하고 고장 잦은 하나로원자로를 당장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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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남태제 | 영화 ‘월성’ 감독



2019년 월성 핵발전소를 취재할 때 만난 청년이 있다. 경북 경주 출신인 그는 20대 초반 나이에 월성 핵발전소의 하청업체에 일용직 노동자로 들어갔다. 2009년 7월이었다. 그 무렵, 월성 핵발전소 1호기에서는 원자로의 핵심 설비인 압력관을 교체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이 업무에 투입되었다. 핵연료봉 가까이서 일했고, 때로 핵폐기물을 운반하는 일도 했다. 몸에 차고 있던 방사선 계측기를 떼어놓고 일할 때도 있었다. 누적 피폭량이 50m㏜(밀리시버트)를 초과하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일했던 9개월 동안 그는 21.32m㏜ 피폭됐다. 일반 시민 피폭 한계치인 연간 1m㏜의 25배가 넘는 피폭량이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피폭량이 5년 합계 100m㏜를 넘지 않으면 되고, 1년 동안 최대 50m㏜까지 허용되기 때문이다.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고용 형태에 따라 피폭량이 달랐다. 2012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방사선 피폭량은 0.14m㏜에 불과했지만, 월성 1호기 압력관 교체 공사에 투입된 하청업체 노동자의 평균 피폭량은 2.65m㏜로 18.9배나 높았다. 일반 시민과 핵발전소 노동자의 피폭 허용량이 달랐고, 같은 핵발전소 안에서도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피폭량이 이렇게 달랐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하청노동자들, 그중에서도 불안정한 일용직 노동자들이 가장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었고 가장 많이 피폭당했던 것이다.



결국, 2012년까지 327일을 일하고 월성 핵발전소를 떠난 청년은 이듬해 ‘호지킨성 림프종’이라는 이름의 혈액암 환자가 됐다. 그는 방사선 피폭 때문에 혈액암이 발병한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수치로 기록된 피폭량이 핵발전소 노동자 피폭 허용치보다 낮고, 병의 잠복 기간이 일반적 이론에 비해 짧았다는 이유로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고 소송했지만 패했다. 같은 시기 같은 업무를 했다가 혈액암을 얻게 된 다른 노동자는 산재 판정을 받았다. 두 사람이 함께 투입되었던 월성 1호기 압력관 교체 공사는 2014년 월성 1호기 수명 연장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핵발전소 수명 연장을 통한 핵 진흥’에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불안정 노동자들, 사회적 약자들이 희생당했다.



경주 감포읍 대본리에서 2021년부터 공사 중인 문무대왕과학연구소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소형핵발전소인 소형모듈형원자로(SMR) 실증 시설과 핵발전소 해체 시설, 핵폐기물 연구 시설 등이 들어서게 될 이곳은 여의도보다 큰 대규모 핵발전 연구단지다. 애초에 지역 주민들은 원자력연구원이 이전해오는 줄 알고 환영했다가, 핵발전 시설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반대로 돌아섰다. 당초 이곳은 방사능 오염 위험성이 매우 큰 핵 재처리 실증 시설의 유력한 후보지였고, 일시 중단된 핵 재처리 실험이 재개되면 언제든지 다시 실증 시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취재 중 만난 지역의 이장협의회 대표는 관광업도 어려워지고 어업도 어려워진 지역 형편으로는 핵 시설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문무대왕과학연구소 부지로 제공된 여의도 넓이의 땅은 애초 경주시가 관광산업을 위해 조성한 ‘제2 보문관광단지’ 부지였다. 결국, 핵폐기물 연구, 핵 재처리, 소형핵발전소 등 핵 진흥을 위한 패키지 설비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지역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지역 주민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핵발전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하여 진흥을 추구한다. 핵발전은 명백히 반인권적 에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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