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이응준의 과거에서 보내는 엽서] [6] 리인모의 북송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993년 3월 20일 지금 나는 휴전선 앞에 서 있다. 어제, 김영삼 정부 출범 한 달도 안 돼,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가 북송됐다. ‘최초’ 비전향 장기수 북송이다. 리인모는 6·25전쟁 중 인민군으로 낙동강까지 내려왔다가, 유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빨치산이 된다. 1952년 지리산에서 체포돼 7년 복역, 1959년에 출소하지만, 1961년 6월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으로 검거돼 27년형을 선고받았다. 1988년 10월까지 복역한 뒤로는 경남 김해의 양아들 집에서 지냈다. 북한은 리인모 송환을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 남한 386 대학가에서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무슨 지사(志士)처럼 여겼고, 북한에 도착한 리인모는 국가 영웅 대접을 받는다. 소설, 영화, 노래, 기념우표의 주인공으로서 동상도 세워진 그는 300만명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 한가운데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조창호 국군 소위는 1951년 5월 강원도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붙잡혔다. 북한으로 끌려간 그는 국군 포로로서 43년간 강제 노역 등의 지옥살이를 견뎠다. 대한민국은 조 소위 구출은커녕 남한에 있는 그의 가족이 그의 탈출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으나 한중 관계 눈치로 방관했다. 언론에서 이를 보도하여 여론이 악화되자, 그제야 받아들였다.

386 대학가는 국군 포로를 멸시했고 대한민국은 ‘평소’ 국군 포로 송환에 소홀했다. 그래서 이 나라에는 진정한 좌파 정부도 우파 정부도 없는 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정상 국가(正常國家)라면 마지막 단 하나의 국군 포로까지 구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백두 혈통’을 칭송하는 저 나치보다 사악한 것들도 조창호 소위 덕에 저럴 수 있는 거다. 북한에서는 남한 드라마 봤다고 청소년들이 공개 처형 당하고 있다. 리인모 조창호 둘 다 역사 속에서 제 신념과 운명 때문에 고생이었지만, 내가 ‘빚을 진’ 이는 대한민국 육군 조창호 소위다. 인민군이며 지하당 조직원 리인모가 아니다. 계산은 정확히 하고 살자.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5분 칼럼' 구독하기

[이응준 시인·소설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