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갈등 해결책으로 뜬 족보센터
서울의 한 의대 본과 2학년 휴학 중인 A씨는 본지 통화에서 “의대는 공부량이 방대해서 족보가 없으면 시험을 치를 수도, 졸업을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의대 족보는 각 과목의 기출 문제나 주요 필기 내용 10여 년 치를 묶어 놓은 자료를 말한다. 학생들이 만들어 공유한다. A씨는 “중간고사 공부 분량은 PPT 자료 수만 쪽인데 족보는 이를 10분의 1 정도로 축약해 준다”며 “족보 없이 혼자만 공부하면 F 학점을 맞고 유급당하기 십상”이라고 했다.
이런 족보가 최근 의대생 복귀를 막는 주요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족보는 의대 학생회나 동아리 선배들이 관리하는데, 복귀하는 의대생에겐 족보 접근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A씨는 “복귀한 의대생 중에 족보 없이 맨땅에 헤딩식으로 혼자 공부하다 지쳐서 다시 휴학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봤다”고 했다. ‘족보 제공권’을 가진 의대 학생회나 지도부는 의대생의 생살여탈권을 가졌다고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
이에 대통령실과 국무조정실은 작년부터 교육부에 “족보 등을 제공하는 ‘의대 교육 지원 센터’를 전국 40개 의대에 설치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교육부는 작년 10월 “각 의대에 센터 설치를 권고한다”고 발표했으나 실제 설치된 곳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족보 제공 배제’는 ‘배신자 낙인’과 함께 의대생의 수업 복귀를 가로막는 양대 장벽으로 통했다. 정부의 ‘족보 센터’ 설치는 이런 족보 문제를 해결해 학생 복귀율을 높이려는 취지다.
의대생들은 “족보 생성에서 제외되는 건 동기, 선후배들에게 차단당하는 걸 의미한다”고 했다. 족보는 의대의 ‘단체 생활’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한 의대생(본과 3학년)은 “우리 의대는 모든 학생이 족보를 만드는 ‘족원’으로 활동한다”며 “시험 때가 되면 각자 나눠서 시험 문제를 외운 뒤 끝나면 이를 취합하는 선배 ‘족장’에게 복원한 문제를 보고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의대 족보를 갱신하고 관리하는 주체는 의대별로 제각각이었다. 학생회가 하기도 했고, 각 의대 동아리 선배들이 관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1년간 의정 갈등을 거치면서 의대 학생회가 관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의대 학생회 지도부가 개별 학생들의 수업 복귀를 막고 단일 대오를 유지하기 위한 용도로 이 족보를 활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 한양대 의대 TF라는 학생 단체는 작년 5월 학생들에게 수업 집단 거부에 참여하지 않으면 족보를 공유하지 않고, 족보 접근권도 영구 제한하겠다고 압박한 혐의로 교육부에 의해 경찰에 수사 의뢰된 바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현재 각 의대가 족보 등을 제공하는 ‘의대 교육 지원 센터’를 설치했는지, 했다면 몇 군데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국무조정실과 보건복지부 관계자들은 “교육부는 처음부터 이 센터가 의대생들을 자극할 수 있다며 반대했다”며 “설치를 권고한다는 말만 하고 설치 상황은 챙기지 않았다”고 했다.
☞의대 족보
각 의대의 10여 년 치 기출 문제와 수업 핵심 내용이 담긴 자료.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공유한다. 시험 범위가 방대한 의대 학생에겐 필수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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