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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 여행에 푹 빠진 나, 과거로의 여행은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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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관온천탕은 건물 역사만도 70년에 이르는데, 관리가 잘되어 깨끗하다. 최갑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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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었나 보다. 주변에 “옛날이 좋았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옛날이 좋았을까? 글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전혀 그렇지 않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지나간 시절은 다만 지나가서 좋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보다 더 불편했고, 더 불합리했고, 더 막무가내였고, 더 폭력적이던 시절이었다. 바닥의 보도블록을 깨고 최루탄 냄새를 피해 도망 다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그래도 더 젊었던 30~40대가 좋지 않아요?” “그 시절이 더 낭만적이지 않았나요?” 이렇게 묻는 사람에겐 다시 한번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그땐 멋모르고 인생의 언저리에서 서성댔던 철부지였을 뿐이다. 물론 지금도 인생을 모르지만, 타인을 이해하려 애쓰고 자신을 용서할 줄도 아는 지금이 훨씬 좋다. 서른살 ‘남자아이’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멋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낭만이라…. 낭만은 지금도 넘쳐난다. 다만 내가 낭만적이지 않을 뿐이지. 게다가 그땐 ‘온천의 묘미’라는 것도 몰랐다.

나는 인생의 반을 여행을 하며 보냈다. 20대 끝 무렵에 신문사에서 직업으로 처음 여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훌쩍 오십이 넘었다. 일로, 밥벌이로 시작한 여행이고, 지금도 여행을 팔아 밥을 벌고 있다. 그래서 아직 취재를 떠날 때면 잘할 수 있을까, 긴장도 되고 그만큼 다짐도 하게 되는데, 취재를 생각하면 어깨가 아프고 허리가 뻐근하다. 그렇게 여행을 하며 뭐랄까, 여행의 취향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조금씩 내 여행의 패턴도 바뀐 것 같다. 언젠가부터 온천이 점점 좋아지더니 이젠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됐다.

느긋한 걸음으로 돌아보기 좋은 외암마을 돌담길. 최갑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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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무작정 아름다운 풍경을 쫓아다니는 것이 좋았다. 남들이 감탄하는 사진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컸다. 무거운 삼각대를 들고 다니며 노을 앞에서, 파도 앞에서, 바위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나만의 한컷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는 사람이 좋아졌다.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여겼다. 50㎜ 렌즈 하나를 끼우고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풍경이고 사람이고 시들해지더니 맛있는 음식이 좋아졌다. 식탐으로 무장하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지금은 뭐, 이것도 좋고 저것도 다 좋다. 카메라도 35㎜ 렌즈가 달린 것 하나만 달랑 메고 다닌다. 때론 이것조차도 무겁고 귀찮게 느껴진다. 휴대전화 하나면 충분하다 여겨질 때가 많다. 좋은 풍경을 만나면 사진 찍는 것도 까먹고 한참을 바라보고, 좋은 사람 만나면 찻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음식은 맛있으면 좋고, 맛이 없으면 그래도 괜찮다. 그래 봐야 한끼지, 이렇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얼마 전 충남 아산 외암마을에 가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온천이었다. 아, 맞다! 아산에는 온천이 있었지. 온양온천도 있고, 도고온천도 있고 말이야. 아주 예전 여행작가를 처음 시작할 때, 도고온천을 가본 기억이 흐릿하게나마 떠올랐다. 참 열심히도 쏘다닐 때였다. 온천물에 몸 담그는 30분, 1시간이 그렇게나 아까웠다. 시간 낭비처럼 여겨졌다. 그 시간이면 사진 한 롤을 더 찍을 수 있는데(필름 카메라를 쓸 때였으니까) 하며 차를 몰았다.

지금은 취재지에 온천이 있으면 그것만으로 마음이 흡족하고 느긋해진다. 온천을 하려고 1~2시간은 일찍 출발한다. 여행 가서 느긋하게 온천물에 몸을 담그지 못하는 인생이라면 그게 무슨 제대로 된 인생인가. 이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새벽 서울 강변북로를 달린다.

신정관온천탕 온탕. 최갑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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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취재도 그랬다. 새벽 5시에 차를 몰고 나와 온양전통시장 앞에 도착한 시간이 아침 7시40분. 온양온천랜드에 갈까 하다가 갑자기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겨 급히 행선지를 바꿨다. 바로 ‘신정관온천탕’이다. 온양온천은 문헌 기록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때부터 유명했는데, 세종대왕도 안질 치료를 위해 행차했을 만큼 전국적인 명성을 날렸다. 아산에는 아산 스파비스나 파라다이스 스파 도고 같은 곳도 있지만, 나 같은 중년에게는 옛날 감성이 가득한 신정관온천탕이 좋다. 온양 지역 온천 1호 원탕(온천수가 나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놀랍게도 입욕료가 단돈 5천원이다. 이 가격에 물 좋은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는 건 거의 횡재다. 신정관온천탕 건물은 1953년 온양철도호텔을 신축할 때 대중탕 용도로 함께 지어졌는데, 현존하는 건물의 역사로만 따져도 70년에 이른다.

아주 옛날식이지만 정말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욕탕은 간소하게 온탕과 냉탕 하나씩만 있다. 주로 동네 주민들이 찾는다. 목욕 바가지며 의자 등이 모두 옛날식이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주인 할아버지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탕에는 아무도 없었다. “독탕 쓰려면 돈 더 내야 하는데” 하시며 할아버지가 껄껄껄 웃으셨고, 나도 “얼마를 더 드리면 될까요?” 하고 껄껄껄 웃었다.

따뜻한 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좋았다.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고 세상 모든 것들이 착실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탕 위로 모락모락 솟아나는 김을 보고 있노라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내 인생도 별 탈 없이 지나가고 있군’ 하는 생각이 든다. 온천은 피부에도 좋고 관절염에도 좋지만, 인생의 조바심을 느긋함으로 바꾸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아름다운 성당으로 이름난 공세리성당 외관. 최갑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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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온천을 ‘열심히’ 하고, 외암마을을 ‘대충’ 취재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비게이션 경로에 공세리성당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웠다.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가운데 하나로,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성당은 프랑스 출신의 드비즈 신부가 1922년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지었다.

공세리성당을 정말 오랜만에 찾았다. 나는 성당 마당에 앉아 성당을 올려다보았다. 두둥실 흘러가는 봄 구름 아래, 문득 꼭 한번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속절없이 세월이 흘렀고 결국 혼자 오게 됐구나. 다 인연이고 운명이겠지.

공세리성당 내부. 최갑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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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떠나간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면서도 오늘 취재한 곳을 머릿속으로 정리했고, 함께 떠오른 문장을 잊지 않기 위해 운전하는 틈틈이 음성으로 메모를 했다. 떠나간 사람은 떠나간 사람이고, 일은 일이니까.

흘러가버린 일들을 낭만화하지 말 것. 되돌리기 불가능한 과거의 일을 자꾸 떠올리는 건 현재의 나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가끔은 떠오를 수도 있고 가슴이 저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오늘의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발 딛고 사는 곳에서 최대한의 행복을 찾을 것.

옛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냐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비급 음식

온양전통시장에는 먹거리가 넘친다. 최갑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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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전통시장에 ‘명물짜장’ ‘홍두깨칼국수’ 등이 있다. 온천을 마치고 먹을 만하다. 가격도 싸다. 5천원짜리 한장이면 충분하다. 공세리성당 남쪽 아래 자리한 ‘공세뜰두부집’은 현지인들이 점심 먹으러 찾는 곳이다. 두부와 청국장이 맛있다.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하루에 딱 콩 한말로 손두부를 만들어 요리한다. 공세리성당 앞 공세리커피는 옛날 양옥을 카페로 꾸민 곳이다.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행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최갑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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