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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6 (토)

    이슈 중대재해법 시행 후

    정석현 회장 "중대재해처벌법서 찾은 값진 교훈은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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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석의 파워인터뷰-정석현 수산그룹 회장

    2022년 중대재해법 시행 앞두고 일선 복귀

    "오너가 직접 앞장서 안전관리 책임쳐야" 신념

    아들·사위에게 각각 CSO·안전관리대표이사 맡겨

    안전관리예산 수십억 투입..사고 없는 회사 이뤄

    근면성실로 발전설비, 건설기계 등 사업확장 성공

    우리 사회에 따뜻함을 전해온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명사들과의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그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공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통찰과 영감을 제공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대담=예종석 명예대기자(한양대 명예교수)·정리=이지현 기자] “책임은 기업 오너인 내가 지겠다.”

    2021년 1월 정석현(73) 수산그룹 회장은 ‘중대재해처벌법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자 이같이 선언하며 경영 일선으로 복귀했다.

    중대재해법은 반복되는 산업재해를 근절하기 위해 2022년부터 시행 중인 법이다. 이후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위반해 인명사고가 발생한 중대재해에 대해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법인을 각각 처벌할 수 있게 됐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법적 부담을 덜고자 기업들은 저마다 꼼수 마련에 나섰지만, 정 회장은 형사처벌 위험을 전문경영인에게 떠넘기지 않겠다며 경영 전면에 나선 것이다. 정 회장은 “나도 처음에는 입법저지운동을 했다”며 “안전관리는 과학과 기술의 영역이다. 심리적으로 잠깐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지속하진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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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석현 수산중공업 회장이 예종석의 파워인터뷰 진행 전 회장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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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마음을 바꿨다. 어느 날 선배 기업가에게 ‘회사에 위기가 생겼을 때 누구를 보내야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일수록 자기가 직접 들어가야 한다고 조언을 받았다. 그는 당시 일을 회상하며 무릎을 쳤다. 유형은 다르지만, 이번에 적용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정 회장은 “내가 직접 책임지면 전문경영인에겐 부담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경영에 참여 중인 큰딸과 사위, 아들도 불러 각오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말했다. 당시 모든 가족이 “OK”했고 그 즉시 정 회장도 대표이사로 복귀해 안전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겐 수산인더스트리 최고안전책임자(CSO)를, 사위에겐 에너지 안전관리대표이사를 맡겼다. 정 회장은 “오늘부터 안전관리 예산은 시간과 제한이 없다. 할 수 있는 한 빨리하라고 지사했다”며 “당시 몇십억을 투입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회사엔 조사받을만한 일이 없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안전보다 더 큰 교훈을 얻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 회장은 “회사가 위기에 처하면 오너가 직접 앞장서서 해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준 것이 더 큰 수확”이라고 활짝 웃었다.

    수산그룹은 발전설비 유지·보수업(수산인더스트리), 건설기계 제조업(수산세보틱스), 보안솔루션 사업(수산아이앤티) 등으로 유명한 중견기업이다. 1980년 석원상사로 시작해 석원산업, 석원그룹으로 성장시킨 정석현 회장은 그룹의 46년사가 아닌 자신의 73년사를 회상하며 “돌이켜보면 사람에겐 운명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운명이라는 궤도가 있고 그 궤도 안에서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달린 거 같다”고 말했다. 그의 운명의 궤도는 어떻게 달랐을까.

    -현대건설 고졸 공채 1기로 입사했는데.

    △원래 고3 여름방학 때 다른 회사에 합격했다. 2학기 때 실습하고 연말에 정식채용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결핵성늑막염이 악화해 학교도 취업도 중단하고 요양했다. 몸이 나아질 때쯤 현대건설의 첫 고졸사원 채용 공고가 떴다. 1969년이었다. 전국에서 공고생 30명을 선발하는데 우리 학교에선 유일하게 합격했다. 현장에서 3년을 일하다 본사 발령을 받아 대졸사원의 보조업무를 맡았는데, 대졸자 못지않게 괜찮게 하려고 퇴근 시간이 저녁 10시를 넘기는 날이 수두룩했다. 잘 안 되는 일은 회사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니 상사의 신뢰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일이 아니었다. 돈이었다. 본사에 근무하니 현장 근무 때만큼 돈이 모이지 않았다. 현장근무 땐 현장수당과 식비가 따로 나와서 수당으로 하숙비를 내고 본봉은 그대로 저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본사 근무는 본봉뿐이었다. 월급으로 비싼 서울 하숙비와 차비를 치르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직장 상사에게 현장근무를 보내달라고 졸랐다. 돈을 모아 대학에 진학할 계획도 털어놨다. 이때 만난 상사가 현장근무 대신 돈 봉투를 건넸다. ‘네가 대학에 들어가겠다면 졸업할 때까지 케어해줄테니 도전해 봐라. 일은 열심히 하면 인정은 받겠지만, 진급은 학력이 좌우한다. 용기 내보라’라고 응원해 줬다. 그래서 공고 기계과 전공을 살려 공대 기계과에 도전했다. 그리고 회사와 집에서 가까운 한양공대 야간을 운 좋게 들어갔다.

    -창업은 어떻게 하게 됐나.

    △은인이었던 상사가 다른 곳으로 가고 새로운 임원이 왔다. 그런데 정반대 분이었다. 지시 전에 다 해두면 ‘왜 네 마음대로 하느냐’라고 했다. 당시 중동 붐이 불면서 해외현장을 고민했다. 3년만 다녀오면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대출 끼고 살 정도로 수당을 많이 줬다. 그런데 중동에 다녀오면 집은 마련하겠지만 아이를 유학까진 못 보내겠더라. 봉급생활자가 그렇게 아이를 지원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 고민하다가 아내 몰래 사직서를 냈다. 당시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이 불러 왜 관두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업을 해보고 싶다’라고 했더니 ‘사업이 그리 쉬운 줄 알아? 하다가 안 되면 다른 회사 가지 말고 다시 와’라고 하더라. 그렇게 나와서 하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안돼서 장만했던 집을 팔아 절반으로 줄이고 경기 안양 비산동에 뉴욕제과 분점을 냈다. 처음에 직접 운영하면서 자리를 잡았고 그 이후부터는 아내한테 맡겼다. 그것 가지고는 밥벌이가 되니 본격적으로 내 일을 찾아 나설 수 있었다.

    -어떻게 사업을 키울 수 있었나.

    △청계천에 공구를 사러 갔다가 우연히 현대건설 근무 때 공구를 납품하던 공구상 영업임원을 만났다. 그는 독립해 공구 장사를 시작했다며 동업을 제안했다. 주위에서 동업은 오래 못 간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각자 사업자 등록을 하는 대신 시장을 파악할 때까지 도와주면 이익 일부를 떼주기로 했다. 그렇게 공구 판매를 위해 석원상사를 세웠다. 그런데 막 사업을 시작한 신출내기에게 누가 일을 주겠나. 그래서 친정인 현대건설을 찾아가 사정했다. 그리고 납품을 시작했는데 6개월 동안 돈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도 요령이 생겼다. 현대건설에서 무슨 공사를 수주했는지를 알다 보니 어떤 특수공구가 필요한지도 먼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특수공구를 미리 선점해 공급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5년만에 청계천 공구상가 중 부가세 납부액 순으로 5위 안에 들 정도로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큰돈은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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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실에 불이 꺼졌다. 인터뷰를 위해 회의실로 이동하며 정석현(73) 수산그룹 회장이 방불을 끈 것이다. 연유를 묻자 그는 “전기요금이 비싸잖아요”라며 웃었다. ‘짠돌이 정신’이 몸에 밴 것이다. 하지만 직원에겐 아낌이 없다. (사진=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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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전문건설 제도와 인력관리도 배웠는데.

    △현대건설에서 나를 참 아끼던 선배가 부르더니 전문건설을 회사규모로 해보라고 권했다. 일본은 전문건설제도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곧 들어올 수 있으니 먼저 준비해보라는 거였다. 그래서 그때 일본 전문건설업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어려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해서 한 게 영광원전(현 한빛원자력발전소) 1호기 배관공사였다. 배관공사에 유능한 작업반장들을 모아 공사가 있을 때만 돈을 주는 게 아니라 회사 소속으로 일하자고 제안했다. 일이 있어도 없어도 월급과 혜택도 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후 현대건설의 턴키(일괄수주)사업인 이라크 알무사이부(Al Musayyib) 화력발전소 배관 공사에 참여했다. 기능공은 한국에서, 용접공은 필리핀에서, 헬퍼는 방글라데시에서 사람을 데려갔다. 그런대로 잘했다. 그러면서 요령이 생겼다. 현대건설이 말레이시아 사라왁(Sarawak) 빈툴루 지역에서 가스 플랜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그때부터 다른 계약을 했다. 현대건설에서 인력을 채용하는 게 아닌 내가 채용하게 해달라고 했다. 현대건설에서 채용한 인력을 현장에 투입하니 트레이닝에 시간이 걸렸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필리핀에 기능공 육성 회사를 차려 그곳에서 충분히 트레이닝을 한 후 후 현장에서 채용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웰딩스쿨(용접학교)도 만들어 전 과정을 학생들이 자비로 다니고 이후 현장에 투입될 때 임금을 주는 구조였다. 이렇게 육성된 필리핀 기능공 800명과 현지인 300명, 한국인 100명 등 3개국 1200명이 공사에 투입돼 공사기간 내에 모든 걸 마쳤다. 토목공사가 아닌 플랜트 공사에서 외국인력을 주축으로 활용해 성공한 1호 프로젝트가 됐다. 이후부터 플랜트 등 현장공사에서 한국인력을 대폭 줄이게 됐다.

    -획기적인 인력관리와 차별화된 기술력은 어떻게 수산그룹으로 이어졌나.

    △1984년에 시작했는데 11년 만인 1995년에 업계 1위가 됐다. 당시 플랜트 공사뿐만 아니라 건물에 들어가는 냉난방을 포함한 설비공사 4000개 업체 중 독보적 1위였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로 사업을 확장하며 현지 공사를 현지 화폐로 계약했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IMF 사태)가 터졌다. 원청사업 계약을 동남아 현지 화폐로 수주했는데 극심한 환율 하락으로 수익 구조가 붕괴하고 말았다.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본드콜(Bond Call, 계약이행보증금을 보증선 금융기관에 청구)을 하라’고 했다. 이 돈으로 공사를 수행했다가는 공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다고 미리 얘기했다. 이건 내가 열심히 안 해서 안 되는 게 아니지 않느냐라고 했다. 그랬더니 말레이시아에서 먼저 ‘환차손만 보존해주면 되겠냐’며 실비보상으로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때 거의 적자 보며 공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해외사업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회사를 팔아버릴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 직원들이 나만 살려 한다고 원망할 거 같았다. 2000년 들어서면서 공사수주하던 것을 중단하고 변신에 들어갔다. 우선 원전 정비 기술력을 보유한 한전KPS의 A급 정년퇴직자를 모았다. 이전 월급의 절반 정도를 주면서 우리의 다음을 준비했다. 그리고 한전KPS가 독점하고 있던 원전 정비 시장에 2004년 우리가 민간 정비업체 최초로 참여하게 됐다. 설치공사 전문에서 정비공사 전문회사가 됐다.

    -타이밍이 대단한데.

    △마침 법정관리를 거쳐 매물로 나온 건설장비업체 수산중공업을 인수했다. 130여개에 이르던 제품 수를 60여개로 줄이고 해외 시장 개척과 기술력 향상에 주력했다. 연간 매출 400억~500억원하던 기업을 1000억원대로 키웠다. 자회사까지 합병해 수산세보틱스로 사명을 변경했다. 스마트 건설장비와 로봇기술 융합에 핵심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어떻게 독자적 기술 갖추게 됐나.

    △현대건설 재직 때 가까이서 정주영 회장의 의사결정을 지켜봤다. 남이 안 하는걸 해서 고부가가치를 남겼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무릎 꿇지 않으려면 독보적인 기술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한동안 하청·납품은 아예 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유혹이 와도 뿌리치기를 10년 했다. 하청이라도 해서 회사 볼륨을 키우려고 했다면 어렵게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하다 보니 함께 일하는 임원들도 새로운 길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아주 좁은 길이지만 길이 보인다.

    -참 어려운 길이다. 앞으로 수산그룹은.

    △발전 사업자로서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베트남 붕따우(Vung Tau) 지역에 70㎿(메가와트) 규모의 태양광 발전소(SH Solar Farm VINA)를 직접 건설,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생산한 전기를 베트남 전력회사에 판매하고 있다. 7월 초부터는 봉화 오미산에 조성된 60.2㎿ 규모의 풍력발전 2대 주주로서 운영·유지보수(O&M)도 맡는다. 원자력부터 신재생에너지까지 우리가 모두 경험하는 거다. 나이지리아의 대표적인 노후설비인 엑빈발전소(전력 플랜트)를 현대화·고효율화하는 ‘레트로핏(retrofitting)’ 사업에도 진출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레트로핏 사업을 진행 중이다. 건설 현장뿐 아니라 광산·골재·토목 분야에 최적화된 광산 장비를 생산·공급하는 수산세보틱스도 지금 대전환기를 맞았다. 연료가 전기로 바뀌고, 기기는 무인화를 넘어 원격화 중이다. 우리도 빨리 흐름을 올라타서 뒤늦지 않게 쫓아가야 한다.

    -향후 승계계획은.

    △몇 년 전에 딸과 사위, 아들을 불러 얘기했다. ‘경영 참여 기회는 주겠다. 그런데 재미가 있고 스스로 성과가 나고 아버지와 함께 경영한 원로들도 (너희에게) 맡겨도 되겠다고 하면 기업 경영을 맡기겠다. 재밌으면 업이 가진 가치를 승계받아서 하는데 만일 그게 아니면 업은 팔자. 그러면 사업을 잘하는 사람이 더 잘할 거다. 팔고 난 돈은 줄 테니 네가 재밌는 일을 하라. 업과 금전적 가치를 묶어서 같이 승계받으려고 하지 마라. 능력이 없거나 재미가 없는 건 안 하는 게 좋다. 뭘 할 때마다 머리가 아픈 일로 생각하면 지겨워져서 언젠간 실수한다.’ 현재 큰딸은 보안솔루션 기업인 수산아이앤티 대표를, 사위는 수산세보틱스 대표이사를, 막내아들은 지주회사 CSO를 맡고 있다.

    -상당히 바쁘다. 난관은 없었나.

    △2008년에 키코(Knock-In Knock-Out, 통화옵션 파생상품) 사태가 터졌다. 당시 부채비율을 낮게 유지하며 자금 관리를 철저히 했다. 당시 키코공동대책위원장을 맡아 은행·금감원과 긴밀히 협의하는 역할을 했다. 그때 한창 뛰어다는데 몸에 이상이 왔다. 간경화였다. 얼마쯤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의사가 “회장님. 키코와 건강을 바꿀래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다 내려놓고 치료를 시작했다. 7년간 투병했다. 술은 끊었다. 음식은 조심히 먹는다. 매일 꾸준히 하는 건 1만~1만 5000보 걷기다. 회사 근처에 집이 있다. 저녁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스포츠센터로 운동을 다녀오면 딱 1만 2000보다. 그렇게 매일 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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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석현 수산중공업 회장이 예종석 대기자와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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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문화대상을 금탑산업훈장보다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나는 노조로 걱정하지 않는다. 노조가 있는 게 관리 효율이나 내부 결속에 훨씬 도움이 된다. ‘신뢰’ 때문이다. 노조위원장이 사측 임원회의에 반드시 참석해 경영 현안을 직접 듣고 궁금한 점은 언제든 공식 질의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경영 상황, 투자 문제, 조직개편 등 사실상 모든 내용을 노조와 공유하는 것이다. 노조가 회사 돌아가는 걸 진짜로 알아야 서로 불필요한 오해가 없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 사업장은 단 하루의 노사분규 없이 운영되고 있다. 노사가 싸우면 회사도 직원도 손해다. 진짜 경쟁력은 신뢰와 소통에서 시작된다.

    -직원 복지로도 유명한데.

    △수산인더스트리는 유치원부터 고교까지 100% 직원 자녀 학비를 지원한다. 대학 등록금도 80%가량 지원한다. 상해보험은 직원만이 아닌 부부를 대상으로 가입시킨다. 산업재해는 물론이고 개인적으로 넘어지거나 암이 생겨도 수술비에 간병인 비용까지 보험으로 모두 지원해준다. 자녀가 중학교 2학년이 되면 개별적성검사를 해준다. 자녀의 특성을 조기에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노조의 요구가 아니었다. 보험료가 제법 나가지만 직원 만족도가 커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업도 사람도 잘 키운다. 베트남에서 장학사업도 한다는데.

    △5년 됐다. 사회 초년생일 때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기회를 준 상사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 하면 갚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여기에 베트남의 명문대인 빈 대학 경영대 초대 학장으로 우리나라 교수가 부임했다는 기쁜 소식을 더해 베트남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끝까지 공부를 마칠 수 있게 매년 5명씩 선발해 ‘최선미 학장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20년쯤 지나면 100명의 수혜자가 베트남 사회에 진출한다. 초 엘리트들이 공무원이 되든 대기업 사원이 되든 다양한 곳에 진출할 텐데 그들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전해지기를 바란다. 민간기업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업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앞으로의 포부는.

    △수산은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한 기업 문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도전하겠다. 함께 성장하는 회사, 신뢰받는 기업이 되겠다.

    ■정석현 회장 △1952년 전북 장수 △전주공고 △한양대 기계공학과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AMP) 수료 △현대건설 고졸 사원 공채 1기 입사 △1983년 석원산업(수산인더스트리 모태)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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