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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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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을 향해 쏴라’ 로버트 레드포드, 할리우드의 별이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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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세로 별세... NYT “자택서 잠든 중 숨져”

    조선일보

    미국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로버트 레드포드/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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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 등의 할리우드 스타 배우이자 감독, 제작자인 로버트 레드포드가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미 뉴욕타임스가 16일(현지 시각)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홍보회사 로저스앤코완 PMK CEO의 말을 빌려 “이날 아침 유타주 자택에서 별세했다. 잠든 중 숨을 거두었다”고 전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영화 제작자인 로버트 레드포드는 그가 주연한 영화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국내 제목 ‘내일을 향해 쏴라’)를 따 선댄스 영화제를 만드는 등 영화계 발전을 위해 다각도로 힘썼던 ‘할리우드의 위대한 별’이었다.

    미국 AP통신은 “물결치는 금발과 소년 같은 미소는 그를 가장 인기 있는 주연 배우로 만들었지만, 그는 정치적 옹호 활동, 화려하지 않은 역할도 기꺼이 맡는 태도, 저예산 영화에 발판을 마련하려는 헌신 등을 통해 외모를 초월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썼다.

    ◊금발의 꽃미남 스타, 1960년대 미 할리우드 황금기를 열다.

    1936년 태어나 미 LA에서 자라 미국연극예술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한 그는 1960년대 초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1962년 TV 시리즈인 ‘찰리 폰트의 목소리’로 미 에미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1963년 닐 사이먼의 히트 연극 ‘맨발로 공원을’의 원작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주연을 맡았다. 영화계에 본격 진출한 것은 1965년. 당대 스타였던 나탈리 우드와 함께 출연한 ‘인사이드 데이지 클로버’(데이지 클로버 안에서)에서 양성애자 영화배우 역할로 주목받으며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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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서부 영화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에서 선댄스 키드 역의 로버트 레드포드(왼쪽)와 부치 캐시디 역의 폴 뉴먼./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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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린 건 1969년 서부극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를 통해서였다. 그는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 폴 뉴먼과 캐서린 로스가 함께 출연한 이 영화를 통해 그는 남성미는 물론 섬세한 세련미를 가진 배우로 인식되었고, 이는 그의 스타일 아이콘이 되었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 1960년대를 밝힌 두 스타의 만남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황금기를 형성하는 데 기반이 됐다. 두 무법자 콤비에 관한 이 서부극은 아카데미상 4개를 받았다. 레드포드는 이 역할을 하는 데 폴 뉴먼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며 “영원히 은혜를 입었다”고 밝힌 바 있다. 스크린에서, 또 밖에서도 평생 친구가 된 둘은 1973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영화 ‘스팅’에서 재회했다.

    레드포드는 로맨스를 그리는 주인공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제인 폰다와 호흡을 맞춘 ‘맨발로 둘이서’(Barefoot in the Park·1967)를 비롯해, ‘추억’(1973)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에서 메릴 스트립 등 당대 연기파 스타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그의 매력을 십분 발휘했다. 비평가 폴린 켈은 미 ‘뉴요커’에 “로버트 레드포드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열렬한 시선을 통해 바라볼 때만큼 빛나고 화려한 적이 없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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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위대한 개츠비' 속 로버트 레드포드(오른쪽) 장면. 미국 디자이너 랄프 로렌이 영화 의상을 디자인 했으며, 이때 입은 핑크 슈트는 이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위대한 개츠비'(2013)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파라마운트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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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미아 패로와 선보인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그를 스타일 아이콘으로 등극하게 했다. 1920년대 ‘광란의 20년대’를 그린 이 영화는 그에게 매료되는 팬들을 대량 생산하게 했다. 디자이너 랄프 로렌이 그를 위해 만든 연한 핑크색 슈트는 ‘남자는 핑크’라는 신 개념을 선사하며 남성복의 지평을 넓혔다. 이때 선보인 폭 넓은 넥타이, 클래식하면서도 우아한 스리피스 슈트, 요즘의 ‘젯셋족’ 같은 감각있는 캐주얼 스타일을 선보이며 ‘개츠비 룩’을 완성했다.

    ◊영화계 ‘내일을 위해 쏜’ 독립 영화계의 대부

    그는 유타주에서 열리는 선댄스 영화제 창립자이자 이사로서 독립영화 운동을 장려해왔다. 현재 미국 독립 영화계를 확립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선댄스 영화제는 스티븐 소더버그, 쿠엔틴 타란티노, 로버트 로드리게스, 케빈 스미스, 제임스 완, 대런 아로노프스키 같은 스타 감독과 제작자를 발굴하고 키워냈다.

    1989년 영화제에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공개한 스티븐 소더버그 같은 재능의 발굴로 만들어진 화제와 함께, 선댄스는 창조적 최첨단의 동의어가 되었다.

    선댄스 영화로 주목받은 작품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을 비롯해 미국 공포 영화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블레어 위치’(1999), 2022년 주목받은 영화 ‘코다’ 등 ‘작은 영화’를 대형 영화로 키웠다.

    특히 성소수자 이슈, 기후변화 같은 진보적 주제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 분야에선 세계 최고 쇼케이스 중 하나로 성장했다.

    선댄스 영화제가 파산할 뻔했지만 로버트 레드포드는 자비를 들여가며 이를 지켜냈다. 1980년대 초 수백 명 참석자에서 2025년 8만5000명 이상의 참석자로 성장하는 영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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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로버트 레드포드/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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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댄스의 상업화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는 데는 선댄스만한 권위를 지닌 곳도 없었다. 영화 ‘라라랜드’로 일약 할리우드 최고 흥행 감독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데뷔작 ‘위플래쉬’(2014)도 선댄스가 발굴한 영화 중 하나다. 당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셰젤 감독에게 투자가 쏟아지며, 그 이후 다양한 영화 작업에 나설 수 있었다.

    ◊디카프리오, 마크 러팔로 같은 환경운동 배우들의 아버지

    그는 영화 배우로서의 출발과 동시에 환경 보호 운동가로의 면모도 보였다. 1961년 유타로 이주하여 그 주와 미국 서부의 자연 경관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주도한 헌신적인 환경운동가였다. 당시 단돈 500달러에 2에이커의 땅을 사고 직접 오두막을 지었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내 인생에서 자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고, 자연이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있고 싶었다”고말했다.

    1970년에 그는 유타 캐니언에 제안된 6차선 고속도로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1975년에는 유타 남부의 석탄 화력발전소 제안에 대해 저항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2014년 미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날카로운 눈을 갖고 태어났다. 내가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게 된다. 무엇이 더 나아질 수 있는지 볼 수 있다”면서 “나는 내 조국을 보면서 삶에 대한 어둠침침한 관점을 키웠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 뉴욕타임스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여러 면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마크 러팔로 같은 스타들이 현재 환경운동가로서 열렬히 활동하는 원형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은퇴란 건 멈추는 것...인생은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 매력적이고 신사적인 배우는 그 다른 배역보다도 낭만적인 역할에 최적화돼 있었다. 배우이자 영화 제작자로서의 그의 삶에는 ‘멈춤’이라는 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2015년 CNN의 유명 앵커 크리스티안 아만푸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받은 것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다”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이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연기와 작품 연출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않았다.

    만년까지 연기 활동을 이어간 그는 2017년 넷플릭스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Our souls at night)을 통해 50년 만에 역시 할리우드 원로 배우인 제인 폰다(88)와 재회했다. 그 둘은 1967년 영화 ‘맨발로 공원을’에서 신혼부부로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제인 폰다는 2017년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해 레드포드와 연기한 소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로버트는 키스를 정말 잘하는데, 20대에 그와 키스하고 80세가 다 돼서 또다시 키스하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듬해에는 그가 과거 ‘스팅’에서 선보였듯 또 한 번의 ‘청춘’을 과시했다. 영화 ‘올드맨 앤 더 건’을 통해 은행 강도를 저지르는 노인의 늦사랑과 강도짓을 하는 이야기를 그만의 스토리로 엮어냈다. 그는 당시 이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은퇴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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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레드포드와 더스틴 호프만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을 연기한 1976년 워터게이트 스캔들 영화‘대통령의 사람들’에서 특종기자로 연기했다./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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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2018년 CBS 선데이 모닝에 출연해 “은퇴는 무언가를 멈추거나 그만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나에겐 중단이라는 것은 없다”면서 “인생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 가능한 한 오래도록 최대한 많이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개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Avengers: Endgame)’에 출연해 대중에게 한번 더 인사를 했다.

    배우로서 아카데미상(오스카상)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감독으로서는 오스카에서 가장 사랑받는 이 중 하나였다. 1980년 감독으로 데뷔한 ‘보통 사람들’은 그에게 오스카 상을 양 손에 안긴 작품으로 기록됐다. 불행한 교외 가족에 대한 드라마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는 1984년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을 담은 ‘내츄럴’과 1993년 데미 무어와 함께 출연한 ‘은밀한 제안’ 같은 히트 영화에 계속 출연했다.

    그는 이후 1993년 ‘흐르는 강물처럼’(오스카상 3개 수상), 1994년 ‘퀴즈 쇼’, 1998년 직접 주연을 맡기도 한 ‘호스 위스퍼러’를 감독했다. 2002년에 오스카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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