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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6 (토)

    다른 맛을 잊게 하는 매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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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제육볶음

    연평도 꼭대기에 있던 해군 레이더 기지는 장교와 수병을 모두 합해 봤자 70명이 조금 넘었다. 망원경으로 바다 너머 북한을 보거나 캄캄한 전탐실에서 점으로 깜빡이는 어선과 군함을 감시했다. 그야말로 섬 꼭대기의 작은 기지였다.

    그곳에서 조리 부사관 하나와 조리병 둘, 그리고 나와 같은 졸병 몇몇이 조리를 전담했다. 모든 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메뉴는 제육볶음이었다. 꽁꽁 언 돼지고기를 해동하는 전날부터 기지가 술렁였다.

    커다란 가마솥에 돼지고기를 붓고 가스불을 올렸다. 김을 내며 돼지고기가 익기 시작하면 다듬은 채소와 고추장, 고춧가루, 설탕, 간장을 콸콸 들이부었다. 전골을 끓이듯 국물을 졸여가며 볶아 상추쌈과 함께 냈다.

    조선일보

    서울 은평구 ‘맛자랑식당’의 제육볶음.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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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배식은 안 해. 야, 그래도 너무 많이 푸는 거 아냐?” 커다란 국그릇에 제육볶음을 퍼담는 병사들을 향해 고참 조리병이 웃으며 말했다. 먹고 싶은 만큼 먹게 한다는 것이 섬 기지의 자부심이었다.

    젊을 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렇게 제육볶음을 먹었다. 매콤한 양념과 돼지고기가 아른거리면 다른 음식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 같지 않았다. 특히 점심부터 고기를 양껏 먹는 게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하루하루가 그때처럼 힘이 나지도, 그럴 일도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날 은평에서 먹었던 제육볶음은 꽤 오랜만이었다.

    통일로라고 이름 붙은 편도 3차선 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그러다 연신내역과 구파발역 사이 중간쯤 멈춰 서니 한편에 ‘맛자랑식당’이란 간판이 보였다. 아침부터 장사를 하는, 예전에는 흔한 백반집이었다. 한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찌개와 탕 종류를 모두 팔고 저녁에는 삼겹살도 곁들일 수 있는 그런 동네 식당이었다.

    늦은 점심이었다. 가게로 들어가니 중년의 부부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한쪽에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고 홀 중앙에는 난로가, 그 위에는 양철 주전자에서 보리차가 끓었다.

    주문을 넣자 앞치마를 맨 중년의 여자가 곧바로 주방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남자가 찬을 가져와 상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찬 가짓수가 적지 않았다. 대략 일곱 여덟 개는 됐다. 몇 년 사이 반찬 인심이 점점 줄어 김치 하나라도 제대로 올라오면 감사해야 하는 시대 아닌가. 여러 반찬 중에 볶은 총각무김치에 손이 갔다. 어릴 때 이해할 수 없었던 물컹하게 씹히는 볶은 총각무의 맛을 알 것 같았다.

    주방에서는 돼지고기 볶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들렸다. 주문이 들어오면 음식을 만든다. 따끈한 보리차 한 잔도 받았다. 가슴부터 단전까지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구수한 보리차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5분 정도 후에 식탁 위에 올라온 제육볶음에서는 하얀 김이 올라왔다.

    한 젓가락씩 맛을 봤다. 채 썰어 넣은 양파와 당근은 아삭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비계가 쫀득하게 씹히는 돼지고기에서는 매콤한 후추 향이 났다.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섞어 쓴 듯 칼칼하면서도 진득하게 혀에 붙는 매운맛이었다. 접시 밑으로 물기가 고이고 고기는 퍽퍽하며 채소는 무른,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누군가 팬과 주걱을 붙들고 불 앞에 서서 바로 만들어 낸 지금의 맛이었다.

    곧 동태찌개가 양철 냄비에 담겨 나왔다. 매콤한 국물 뒤로 시원한 바닷바람이 느껴졌다. 바지락·미더덕이 넉넉히 들어 국물 맛이 복잡했다. 내장에서 나온 기름기에 국물이 두터워졌다. 툭툭 집어넣은 쑥갓과 콩나물은 아직 멀기만 한 봄내음 같았다. 상추에 제육볶음과 밥을 올렸다. 찌개 국물에 밥을 비볐다. 하나하나 까다롭게 맛을 보려다가 어느 순간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중간중간 다가와 “모자라면 이야기해요”라고 말을 걸었다. 이런 밥상을 차려주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바다 위 북방한계선 바로 앞에서 늘 배가 고프고 틈만 나면 달리고 싶던 젊은 날이 있었다. 배도 뜰 수 없는 폭풍이 불어 섬이 고립될 때, 아무런 연고 없이 섬까지 밀려온 병사들은 괜히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래도 배고픈 적은 없었다. 배식 준비를 해놓고 저 뒤편에서 주방 사람들은 흐뭇하게 늘 웃고 있었다.

    혼자 저절로 나이 들지 않는다. 그 고마운 마음이 조금씩 모여 지금의 내가 있다. 그렇기에 나는 오직 나 혼자가 아닌 것이다.

    #맛자랑식당(은평구 갈현동): 백반 9000원, 제육볶음 1만2000원, 동태찌개 1만2000원, 02-357-1769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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