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익 안전가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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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장르 전문 스토리 프로덕션' 안전가옥의 김홍익 대표는 그 자체로 '장르 덕후'다. 김 대표가 기대선 안전가옥 사무실 서가에는 이영도, 김보영, 테드 창, 켄 리우 등이 쓴 장르문학 소설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하상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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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해리포터' 출판사 뚫고 영미권 대형 출판사와 연이어 계약… 글로벌 시장 정조준'
이런 제목의 보도자료를 지난 7월 30일 받았다. 콘텐츠 프로덕션 안전가옥이 2021년 선보였던 천선란 작가의 장편소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가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를 펴낸 영국 출판사 블룸스버리에서 출간됨을 알리는 내용. 발신자인 김홍익(42) 안전가옥 대표는 "소위 K문학의 주요한 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경쟁력 있는 K스토리를 적극 발굴하고 세계 무대에 선보여 K콘텐츠 지평을 넓히는 데 앞장서겠다"는 포부를 내놨다. "조앤 K 롤링이 찾는 회사"를 꿈꾸며 안전가옥을 세운 지 10년도 채 안 돼 거둔 쾌거였다.
안전가옥의 보법이 실로 남다르다. 덕후의, 덕후에 의한, 덕후를 위한 출판사. 공상과학(SF), 판타지, 미스터리, 호러, 로맨스 등 '장르 전문 스토리 프로덕션'으로 나아간다. 일찌감치 장르 팬덤을 파고든 독창적 행보다. 그 뒤에는 '덕후 중에 덕후'인 김 대표가 있다.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 자리한 그의 놀이터, 안전가옥 사무실을 찾았다.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 있는 안전가옥 사무실 한쪽에 진열된 안전가옥이 펴낸 책들. 안전가옥은 장르 덕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조예은의 '칵테일, 러브, 좀비' 등 단편 선집인 '쇼트-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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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의, 덕후를 위한 '장르 전문' 안전가옥
"SF 독자는 3,000명이라는 슬픈 농담이 업계에 있어요. SF 소설, SF 웹툰, SF 영화, SF 드라마를 찾는 사람들을 다 긁어모아 그 정도라는 얘기죠. 한 사람이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본다는 거고요. 그러니까 진짜 소수면서 오타쿠 중 오타쿠라는 뜻이에요."
김 대표의 말처럼 장르문학은 열정적이지만 소수의 독자를 거느린 데다 순문학 위주 문단에서 비주류 취급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장르물을 출판하는 안전가옥을 세운 건 콘텐츠의 가능성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삼성전자를 거쳐 카카오 전략팀에서 4년쯤 일했다. 자회사 카카오페이지가 웹툰으로 공전의 글로벌 히트를 치던 때다. "한국 콘텐츠로도 전 세계를 휩쓸 수 있다는 걸 본 거죠. 해리포터 시리즈를 모티브로 삼았어요. 롤링이 출판사 13곳에서 출간을 거절당했지만 마지막에 블룸스버리를 만나 대를 이어 소비하는 콘텐츠가 됐잖아요. 우리나라에서도, 정확히는 제가 창작자들과 함께 그런 일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어요."
2년 전부터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김홍익 안전가옥 대표는 조예은 작가의 '칵테일, 러브, 좀비' 등 한국 창작자들의 소설들을 출간하고 사업화하면서 그동안 펼쳐온 노력이 유의미한 이정표를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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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업전략적 판단도 작용했다. 그는 "한국에서 장르가 마니아들의 시장이라 해도 영국 마니아, 프랑스 마니아, 중국 마니아를 글로벌하게 모으면 사이즈가 된다"고 확신했다. 장르가 가진 고유의 문법은 웹툰이나 영상으로 만들 때 언어의 장벽에서 자유롭다는 이점도 있었다. 변화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모두가 좋아하는 국민 콘텐츠의 시대는 끝났어요.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미치게 좋아하는 콘텐츠의 시대가 온 거죠." 매년 6월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이 상징적 사례다. "과거 도서전이 바자회 느낌이었다면 요즘은 덕후들의 페스티벌 느낌이 강해요. 예전처럼 책이 100만 부, 200만 부 팔리는 시장은 되지도 않거니와 작가를 덕질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거죠."
"K문학 붐,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는 온다"
2017년 서울 성수동 3층짜리 건물에서 출발한 안전가옥은 2019년 첫 오리지널 장편소설인 조예은 작가의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을 펴내면서 대변화를 꾀했다. 장르문학 창작자들을 위해 운영했던 공간을 정리하고 현재의 사무실로 옮겨오면서 본격적인 콘텐츠 프로덕션으로 재정비에 나선 것. 김 대표는 "카세트 테이프나 CD를 찍던 음반사가 아티스트를 기획하고 월드투어까지 모든 걸 다하는 기획사 형태로 가듯 안전가옥도 출판계에서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안전가옥의 첫 오리지널 장편소설인 조예은의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과 영화화 판권이 팔린 이경희의 '그날, 그곳에서', 전건우의 '뒤틀린 집'. 안전가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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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덕후'들의 취향을 정조준한 안전가옥의 출간물로는 '쇼트-시리즈'가 있다. 세로로 길쭉해 한 손에 잡히는 판형으로 눈길을 끈 단편 선집으로, 작고 얇은 책 트렌드를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너울 작가의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2021)로 시작을 알린 이후 두 번째로 나온 조예은의 '칵테일, 러브, 좀비'가 13만 부나 팔렸다. 이경희 작가의 '그날, 그곳에서'(2021)는 김 대표에게 감회가 새로운 책. 영상화 판권이 처음 팔리면서 "안전가옥은 단순 출판만 하는 회사 아닙니다"라고 알릴 수 있게 한 작품이다. 출간도 전에 영화화가 확정됐던 전건우 작가의 '뒤틀린 집'(2021)은 현재 넷플릭스에서 동명의 영화로도 볼 수 있다.
안전가옥을 대표하는 '쇼트-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심너울의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와 지난해 런던도서전에서 해외 출판사의 큰 관심을 끌었던 박에스더의 '벽사아씨전'. 안전가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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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문학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는 확실히 커졌다. 다만 K문학이라고 부를 만한 흐름이 형성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노벨상 탔다고 하루아침에 한국에서 폴란드 소설 붐이 일었던 건 아니잖아요. K팝이 한때 마니아만 즐기는 음악에서 이젠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차트 1위를 찍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처럼, K문학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언제 오느냐의 문제일 뿐 오긴 올 거예요."
"독서는 가장 사랑스러운 덕질"
활자중독자이자 장르덕후인 김 대표는 덕질이 곧 업(業)이 되는 '덕업일치'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판타지 문단의 거장 이영도, 국내 SF 기반을 닦은 김보영, 세계적인 SF 소설가 테드 창과 켄 리우를 즐겨 읽는다. 최근에는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 에드워드 리의 '버터밀크 그래피티', 빌 게이츠의 '소스 코드'를 특히 재밌게 봤다. 그는 "오랫동안 쌓아온 개인의 고유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며 "엄청난 기교를 담지 않고 쓱 썼을 뿐인데 스토리가 대단하기에 엄청 재미있고 고유한 이야기를 만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김홍익 안전가옥 대표는 조만간 논픽션 브랜드 '사각'을 론칭하고 육아에 대한 인터뷰집을 선보일 예정이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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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나 중동 지역 문명의 흥망성쇠, 교류사에 대한 책은 "이성과 상관없이 끌려 버린다"고.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와 실크로드학 권위자인 정수일의 책은 전부 소장하고 있을 정도다. 대학 시절 읽었던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기억력만 허락한다면 통째로 외우고 싶은" 책이다. 김 대표는 "대학에 입학해 직장을 다니는 동안 소위 오춘기를 겪을 때 여러 번 읽으면서 인생의 지침으로 삼았다"며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불행할 이유가 없으니까 산다는 책의 메시지가 너무 와닿았다"고 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던 건 중학교 때부터다. 김 대표의 비범함을 알아본 담임 교사는 추천도서 목록을 손수 써주고 일종의 북클럽 활동을 함께해 줬다고 한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 테드 알렌·시드니 고든의 '닥터 노먼 베쑨',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 등을 탐독했다. 김 대표는 "안전가옥을 창업하는 데 조미숙 담임 선생님 지분이 꽤 있다"고 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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