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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4 (수)

    구조대원은 영웅이 아니고 노동자다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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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

    2001년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9.11 테러 당시 처참히 무너진 월드트레이드센터 근처에서 구조작업을 벌이는 소방관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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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맨해튼 남쪽이 잿더미로 변했다. 세계 경제의 상징이던 무역센터(WTC) 남북 타워가 불과 30분 간격으로 무너져 내렸다. 영화보다 훨씬 극적이었던 충돌, 폭파, 붕괴의 장면은 세계인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불타는 '그라운드 제로'에 구조를 위해 뛰어든 사람들은 소방관, 경찰, 응급의료기사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었다. 폐허 위에서 잿빛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구조에 땀흘리던 그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영웅'이었다.

    환호와 찬사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건물이 붕괴한 자리엔 중금속, 유독가스, 석면 등 수 천종의 독성물질이 가득했고, 건물의 철골 잔해들도 위태로웠다. 그곳에서 소방관 343명, 경찰 60명 등 총 412명의 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구조에 참여한 수천명이 사고후 부상이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암 등의 치명적 질병으로 고통 받았으며, 사후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수백명에 달했다.

    소방관 노조(UFA)는 '우리는 영웅이기 전에 노동자이며, 안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거짓정보와 책임회피, 피해보상에 소극적인 정부를 비판했다. 연방환경보호청(EPA)은 재난 초기 '공기 질에 위험은 없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구조를 강제하기 위한 정치적 조작이었다. 무엇보다 9·11 직후의 구호와 지원은 민간인 희생자에 집중되었고, 구조대원은 대부분 배제되었다. 그들은 '눈앞의 화염보다 정부의 무책임이 더 무섭다'고 주장하며 시위했다.

    보호와 보상이 제도화된 건 10년이 지나서였다. 9·11 당시 뉴욕 경찰관이던 제임스 자드로(James Zadroga)가 구조 작업 후 폐섬유화로 사망(2006년, 34세)했고, 이를 계기로 구조대원에 대한 정치적 관심과 보상 논의가 본격화했다. 2010년 '제임스 자드로 9·11 건강 및 보상법'이 의회를 통과했고, 2011년 1월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으로 공포되었다. 구조 노동자의 안전하게 일할 권리가 비상 상황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데 10년 걸렸다.

    우리라고 다를까. 그간의 대형 사고와 재난 대응의 키워드는 위험을 무릎 쓴 신속한 구조, 희생자에 대한 예우와 보상이었지 안전한 구조, 구조대원 보호는 뒷전이었다. 세월호 구조에 참여했다 PTSD로 사망한 다수의 구조원들, 안전장비 없이 실종자 수색에 투입되었다 사망한 해병대원 등은 상징적이다.

    한국일보

    지난 11월 14일 오후 울산화력발전소 붕괴 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마지막 매몰자를 찾기 위해 수색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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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정부는 산업재해 예방에 적극적이다. 국무회의 때마다 일터 안전이 강조되며, 노동부 장관은 공장, 물류센터 등 현장을 수시로 방문한다. 그래도 사고가 쉽게 줄지 않는다. 시간이 곧 이익인 사업구조, 안전 보다는 속도를 중시하는 노동문화, 중층으로 도급화된 위계적 공급망 등 하루에 고치기 어려운 문제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6일 발생한 울산 화력발전소의 사고 또한 충격적 비극이다. 공공기관에서 발생한 사고라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고에 대응하는 자세와 철학은 이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무너진 타워 양 옆의 또 다른 두 탑이 매우 위험했다. 사고 타워 잔해더미에 노동자들이 있었지만 무리한 구조는 2차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결단은 노동부 장관의 몫이었다. 그는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업무인 국회 예결위를 차관에게 위임하고 현장에 상주했다. 신속한 구조가 급했으나, 구조 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담보가 우선이었다. 장관이 주재하고 피해자 가족, 관계부처, 민간 전문가 등이 마주 앉아 진행한 십수 차례 중수본 회의는 아우성과 논란의 장이었다. 노조 위원장 출신 장관은 여러 이해관계자의 어려운 요구와 주장을 조정했고, 결국 '즉시 구조'에 앞서 4호와 6호 타워의 우선 발파를 결정했다.

    재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자연재해, 산업재해 모두 원인을 막아 원천에서 예방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일어난 사고와 재난을 안전하게 수습하고 피해를 최소로 하는 일은 정부 몫이다. 울산 발전소 사고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재난이었지만, 사후 대응과 구조 방법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미국의 입법례를 참고해 안전한 구조와 사고 수습, 구조 노동자에 대한 보호와 보상의 체계 마련을 서둘러야 할 때다.

    한국일보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전문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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