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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6 (토)

    이슈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 자백

    아리셀 대표 1심 ‘징역 15년’ 최고형…유족 “1명당 1년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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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아리셀 참사 유가족 최현주(54)씨가 휴대전화를 보고 있다. 아리셀 연구소장 고 김병철씨의 아내인 최씨는 ″남은 이들에겐 참사 이후의 삶도 참사″라고 말했다. 최모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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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최고 형량이라고 하는데 (사망자) 1명당 1년도 안 되네요.”

    23일 법원이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를 부인한 박순관 아리셀 대표와 아들 박중언 아리셀 총괄본부장에게 각각 징역 15년을 선고했지만 최현주(54)씨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현주씨는 지난해 6월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 23명 희생자 중 한 명인 김병철(53)씨의 아내다. 그는 “우리는 (참사 이후 모든 것이) 다 무너졌는데, 오늘 (중형이 선고되자) 비로소 박순관이 얼굴을 감싸 안고 괴로워하더라”며 허탈해했다.



    삼고 초려로 재입사…참사 발생하자 ‘소장 탓’



    남편 병철씨는 참사 당시 아리셀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일차전지 배터리를 연구하고 품질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병철씨는 2021년 아리셀에 입사했다가 퇴직했다. 그러자 박 본부장이 이들이 사는 충북 청주시를 여러 차례 찾아오는 등 삼고초려(三顧草廬)하면서 2023년 재입사했다고 한다. 박 본부장은 수능을 보는 병철씨의 딸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등 다정한 동료였다. 현주씨도 박 본부장이 첫 아이를 낳자 호박즙과 미역을 선물하는 등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주씨는 참사 당일인 2024년 6월 24일, 누구보다 박 본부장의 전화를 기다렸다. 연락이 닿지 않는 남편의 행방과 사고 상황 등을 박 본부장이 설명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가 하나 날라왔다. ‘고 김병철 님 송산장례문화원 안치’ 소방서에서 보낸 문자였다. 아리셀에선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현주씨를 더욱 기막히게 만든 건 아리셀의 태도였다. 수사와 재판이 시작되자 박 대표와 박 본부장의 변호인들이 “병철씨 탓”을 했다. 이들은 “사고 발생 20일 전 연구소장인 병철씨가 아리셀 임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미세발열 배터리를 2일, 3일 동안 두면 다시 정상 온도로 돌아온다’고 해 이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이후 현주씨의 투쟁도 시작됐다. 그는 배터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집인 청주와 재판이 열리는 수원, 아리셀 모회사인 에스코넥 본사가 있는 광주, 국회 등을 오가며 싸웠다.

    현주씨는 “인력업체 파견 근무자인 다른 피해자들과 달리 남편은 임원급이라 아리셀에서 책임을 떠넘길까 봐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메일 속 일부 문장을 인용해 남편 탓을 했다”며 “남편이 보낸 메일엔 ‘발열 원인을 찾기 위해 6개월 정도 공정을 멈추고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있다”고 꼬집었다.

    중앙일보

    공장 화재로 23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와 관련해 중대재해처벌법으로 기소된 일차전지 업체 아리셀 박순관 대표의 1심 선고가 내려진 23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유가족 및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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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이중적인 아리셀의 태도에 현주씨는 끝까지 아리셀 측과 합의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 18명의 유족이 아리셀과 합의했고 2명의 유족은 일부만 합의했다고 밝혔다. 현주씨는 “만약 아리셀에서 참사 당일 사과하고 사고 원인 등을 설명했으면 내가 제일 먼저 합의했을 것”이라며 “아리셀 측이 ‘합의서에 도장을 먼저 찍어야 사과하겠다’고 하더라”고 분개했다.



    1심 재판부 “‘합의하면 선처’ 악순환 뿌리 뽑아야”



    수원지법 형사14부(부장 고권홍)는 이날 박 대표에게 징역 15년, 아들인 박 본부장에겐 징역 15년 및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2022년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기소된 사건에서 내려진 최고 형량이다. 이들은 지난해 9월 24일 유해·위험 요인을 점검하지 않고, 중대재해 발생 대비 매뉴얼을 구비하지 않는 등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또 박 본부장의 공범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홍모 아리셀 상무와 정모 파견업체 한신다이아 대표 등 2명에게는 징역 2년씩, 박모 아리셀 안전보건관리담당자에겐 금고 2년, 오모 아리셀 생산파트장에게는 금고 1년이 각각 선고됐다. 주식회사 아리셀엔 벌금 8억원, 주식회사 한신다이아 및 메이셀에 각 벌금 3000만원, 강산산업건설 주식회사에 벌금 1000만원이 선고됐다. 보석 석방돼 재판받던 박 대표 등 아리셀 임직원 등 5명은 선고 직후 모두 법정구속 됐다. 업무상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기소된 아리셀 직원 이모 씨에겐 무죄가 선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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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부는 “박순관은 아리셀 설립 초기부터 경영권을 행사해 왔고 이 사건 화재 시까지 동일하게 유지된 점, 주간 업무보고 등 주요 사항을 보고받고 경영 판단이 필요한 경우 개별 사안 업무 지시를 내리는 등 피고인이 최종 권한이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며 “(박순관 대표는) 명목상 대표이사가 아닌 사업총괄책임자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박 본부장 등이 파견근로자들에 대한 안전보건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위험물질을 취급하는 작업장이 있는 건축물에 설치해야 하는 비상구나 비상 통로를 이용하기 어렵게 유지한 점도 모두 인정하며 “(이로 인한) 전지 폭발 및 화재 사고로 23명의 근로자를 사망하게 했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예측 불가한 불운한 사고가 아니라 언제 터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예고된 인재였다”고 판시했다. 이어 “기업이 근로자의 안전·보건에 관한 부분에는 비용을 최소화해 이윤을 극대화하다가 막상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막대한 자금력으로 유족과 합의를 시도하고, 유족은 생계유지를 위해 선택의 여지 없이 합의에 이르게 돼 기업가가 선처를 받게 되는 선례가 많다”며 “이런 악순환을 뿌리 뽑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 발생률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판이 끝나고 현주씨는 유가족 대표로 기자들 앞에 섰다. 그는 “법원에서 ‘이번 사례가 우리 사회의 선례가 돼야 한다’고 했다. 우리 싸움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앞으로의) 재판 과정에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강조했다.

    최모란 기자 choi.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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