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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6 (토)

    “빚 갚지 말라”…‘배드뱅크 브로커’ 활개 [사라진 시장 원리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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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용금융’이 부른 ‘금리 역전’ 현실화


    정부·여당에서 대규모 빚 탕감 등 신용 질서에 역행하는 정책이 쏟아지는 가운데, 시장에서는 도덕적 해이와 고신용자 역차별 문제가 들끓는다. 금융은 ‘빌린 돈은 갚는다’ ‘잘 갚으면 이자율을 낮춘다’ 등 상환 의무와 상호 신뢰를 전제로 작동한다. 이런 신뢰가 뿌리부터 흔들리자 금융의 기본을 지키는 게 오히려 ‘손해’를 보는 역설적 상황이 펼쳐진다. 전문가들은 ‘포용금융’ ‘상생금융’ 등 금융 포퓰리즘이 우리 시장 질서를 훼손하는 독버섯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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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대통령은 10월 14일 서울 동대문구 콘텐츠문화광장에서 열린 디지털토크라이브 ‘국민의 목소리, 정책이 되다’에서 금융위원회를 향해 소상공인 등 취약계층의 부채 탕감 정책을 더 강하게 추진할 것을 당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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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늘 1. ‘배드뱅크’의 역설

    도덕적 해이 전염

    정부는 역대 최대 규모 개인 빚 탕감 정책을 추진 중이다. 배드뱅크(부실 자산 인수·정리를 위한 전문 기관) ‘새도약기금’을 활용해 7년 이상·5000만원 이하 빚 16조4000억원을 2026년부터 순차적으로 탕감한다.

    전문가들은 “갚을 필요 없다”는 식의 분위기 조성을 우려한다. 이미 도덕적 해이는 시작됐다는 평가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카드대출 연체율은 2023년 말과 2024년 말 2.4%를 유지했다. 하지만 올해 8월 말 3.3%로 치솟았다. 또 2030 청년층의 인터넷전문은행 신용대출 연체율도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인터넷은행 청년층 신용대출 연체 현황이 악화일로를 걷는다. 카카오뱅크 30대 이하 차주의 연체 규모는 2022년 말 368억원에서 올해 7월 말 기준 577억원으로 약 57% 늘었다. 이 기간 연체율은 0.9%에서 1.5%로 0.6%포인트 상승했다. 같은 기간 토스뱅크의 청년층 신용대출 연체율도 0.9%에서 1.3%로 0.4%p 올랐다.

    정치권에서도 우려해온 지점이다. 앞서 국회 정무위원회 검토보고서에는 “배드뱅크는 성실 상환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시킬 우려가 있다”면서 “사회 전반에 고의적 연체와 채무 불이행을 조장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연체율이 높아지는 부작용이 발생할 우려가 있어 보인다”는 내용이 담겼다.

    불분명한 심사 방식도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 원칙적으로 사행성·유흥업 채무는 탕감 대상에서 제외된다. 문제는 사행성 채무 선별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0월 23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금융기관으로부터 부실채권을 일괄적으로 매입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빚이 도박 빚인지 사행성 오락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안다”며 “빚 종류를 일일이 분류할 수 있느냐”라고 질의했다. 이에 정정훈 캠코 사장은 “지적하신 대로 완벽하게 투자자금인지 도박자금인지 구분이 불가능하다”며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겠다”라고 답했다. 채무자가 자발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선별 탕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한계 상황에 몰린 취약층을 노린 ‘배드뱅크 브로커’도 벌써부터 기승을 부린다. 유튜브·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SNS)에서는 “채무 조정과 탕감을 받을 기회” “불법 도박 빚 탕감받고 인생 리셋” 등 홍보물이 눈에 띈다. “추심 압박을 버티며 원금 탕감을 기다려야 한다. 도움 받으려면 상담 문의하라”는 식이다. 이 중에는 불법 광고도 섞여 있다. 상당수는 대출중개인이나 대부 업체가 운영 중인 배드뱅크 브로커다. 상담을 미끼로 채무자들을 유혹한 뒤 협업을 맺은 변호사에게 연결해 수수료를 챙긴다. 이 자체로도 위법 소지가 있다. 변호사 자격증이 없는 이가 채무 조정 대리 행위 일부를 하며 수수료를 대가로 변호사에게 사건을 넘기는 것은 변호사법 위반이다. 또 만약 브로커의 지시로 대출금 사용처를 속인 뒤 부정 행위가 밝혀지면 책임은 채무자 몫이다. 대부 업계 관계자는 “이런 수수료를 내야 한다며 대부 업체를 찾는 장기 채무자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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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늘 2. ‘신용 원리’ 무력화

    금리 역전 현상 벌어져

    신용(Credit) 원칙도 흔들린다. 신용 거래 기본 원칙은 ‘위험과 보상’이다. 은행 등 대출 기관이 돈을 빌려줄 때는 돈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 즉 대출 불이행 위험도를 평가한다. 만약 돈을 빌려 가는 사람이 저신용자여서 돈을 갚지 못할 위험이 높다면, 은행은 위험을 감수한 대가로 높은 이자율(보상)을 요구한다. 반대로, 고신용자는 돈을 떼일 위험이 매우 낮다. 은행은 낮은 이자율을 적용한다. 이러한 이자율 책정 방식은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넘어, 금융 시장이 돌아가게 하는 핵심 원동력이다. 이는 돈을 빌려 간 채무자들이 더 좋은 조건(낮은 이자율)으로 대출을 받기 위해 꾸준히 경제활동을 하도록 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질서를 정면으로 뒤흔든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한 고금리 서민금융상품을 두고 ‘잔인한 금융’이라고 질타하며 “고신용자 금리를 올려 저신용자에게 도움을 주라”고 강조했다. 신용도(크레디트)대로 금리를 물리는 게 아니라 반대로 가는 ‘역크레디트’ 구상이다.

    시장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고신용자를 ‘부자’로 착각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신용평가사는 재산을 평가해 신용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대출을 제때 갚고 각종 공과금이나 요금을 연체하지 않은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준다. 예를 들어 NICE평가정보의 개인 신용 평점 계산 요소는 ▲현재 연체·과거 채무 상환 이력 ▲부채 수준 ▲신용 거래 기간 ▲체크·신용카드 이용 정보(신용 형태) ▲비금융·마이데이터 정보 등 총 5가지다. 통계를 봐도 ‘고신용자=부자’가 아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성권 국민의힘 의원이 NICE평가정보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신용평가 점수 600~700점 구간 연평균 소득은 4222만원으로 나타났다. 윗 구간인 850~900점 구간(3946만원), 800~850점 구간(3356만원), 750~800점 구간(2912만원)과 비교해 평균 소득이 높았다.

    정부 방향성에 맞춘 상품 취급이 늘면서 저신용자가 오히려 낮은 금리를 적용받는 ‘금리 역전’ 현상도 나타난다. 은행연합회 소비자포털에 따르면, 하나은행이 지난 9월 신규 취급한 신용한도대출(마이너스통장) 중 신용 점수 600점 이하 최저 신용자 금리는 3.46%를 기록했다. 최고 신용등급 구간인 951점 이상(4.54%)과 950~901점 구간(4.65%)보다 낮게 책정됐다. 우리은행과 BNK부산은행도 마찬가지다. 우리은행 최저 신용 점수 구간 금리는 4.77%로 950~901점 구간(4.88%), 900~851점 구간(5.09%)보다 낮았다. BNK부산은행도 최저 신용 점수 구간 금리가 4.11%로 최고 신용 점수 구간(5.11%)이나 950~901점 구간(5.46%)과 차이가 컸다.

    은행권에서는 정책금융 여파라고 말한다. 특정 계층을 위한 생활 안정 자금 관련 한도 대출 등을 취급하면서 금리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는 설명이다. 은행권에서는 정부 차원의 ‘포용금융’ 의지가 강한 만큼, 이 같은 현상이 늘어날 것으로 바라본다. 우리금융그룹은 최근 정부 기조에 맞춰 2030년까지 5년간 총 80조원을 투입하는 ‘우리금융 미래 동반 성장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기업 대출 등 생산적 금융에 73조원을,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포용 금융에 7조원을 배정했다. 하나금융그룹도 ‘하나 모두 성장 프로젝트’를 통해 총 100조원 지원책을 내놨다. 생산적 금융에 84조원을, 포용 금융에 16조원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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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중구 우리금융그룹 본사에서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가운데)이 생산적·포용금융에 80조원 추진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우리금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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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늘 3. 관치금융 악화일로

    국가 재정 부담 불가피

    일각에선 정부의 ‘포용·생산적금융’이 관치금융 통로가 됐다는 냉소가 터져나온다. 관치금융은 그 자체로 시장 원리에 위반된다. 자본의 효율적 배치를 막고 구축(驅逐) 효과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지옥으로 가는 길은 늘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말한 배경이다. 선한 의도라도 시장 원리를 거스른 정부 개입이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국가 재정 부담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 정부 주도 프로젝트인 만큼 적잖은 국가 재정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손실 발생 시 이를 보전하는 것도 국가 재정이다. 경제학자들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관치금융은 최소화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가령, 새도약기금에도 국가 재정이 투입된다. 새도약기금이 부실 채권(빚)을 매입하는 데 필요한 돈은 약 8400억원이다. 이 가운데 4400억원은 금융권이 부담하지만, 4000억원은 지난 6월 2차 추가경정예산으로 확보한 재정이 투입된다. 1차적인 재정 부담이다. 문제는 손실 발생에 따른 추가 재정 투입 가능성이다. 민간 은행이 부실 채권 10만원을 기금에 헐값(3만원) 매각했다고 가정했을 때, 기금이 채무자로부터 2만원 회수에 그쳤다면 1만원은 손실로 잡혀 재정 부담을 키운다. 새도약기금은 상환 능력이 아예 없는 저신용자의 부실 채권만 완전 소각한다. 나머지는 30~80% 채무 조정 방식이다.

    정부 주도 금융 프로젝트는 이게 끝이 아니다. 정부는 첨단 산업 투자 용도로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를 추진 중이다. 산업은행이 운영하는 첨단전략산업기금 75조원, 민간·국민·금융권 자금 75조원으로 구성된다. 당장 75조원 마련에 따른 1차 부담도 있지만 손실 발생에 따른 2차 부담 요소도 있다. 국민성장펀드는 35조원 규모 간접투자도 포함한다. 이 가운데 국민참여형은 앞선 문재인정부의 ‘뉴딜펀드’를 참고했다고 알려진다. 손실 발생 시 국가 재정으로 보전하는 구조다. 앞선 뉴딜펀드에서는 청산 완료 자펀드 10개 중 4개에서 손실을 입었다. 재정 부담은 결과적으로 국채 발행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국채 금리 상승(가치 하락) → 이자 부담 증가 → 재정 압박 악순환이 초래된다. 경고등은 이미 켜진 상태다. 지난 10월 29일 국고채 10년 만기 금리는 2.96%로 거래를 마쳤다. 연중 최고 수준이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3호 (2025.11.05~11.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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