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지난 1일 베트남 하노이 터이사 인근 한 바위 동굴의 '소년상' 앞에서 한 여성이 아들 임신을 기원하며 기도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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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베트남 하노이 외곽의 유서 깊은 불교 사찰 터이사(寺). 고대 사원을 지나 산길을 따라 오르자 ‘아들을 점지해준다’고 알려진 바위 동굴이 나타났다. 한낮에도 어둑한 동굴 안에는 여성 네댓 명이 촛불에 의지한 채 기도하고 있었다.
몇몇은 성인 키보다도 큰 바위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소년상’이라 불리는 이 상을 만지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이 있다. 하노이에서 온 30대 여성 마이는 “이미 딸이 하나 있지만 남편이 집안의 외아들이라 아들을 갖고 싶어 해 왔다”고 말했다.
음력 보름날인 지난 4일, 하노이 도심 사찰 하사(寺) 역시 시민들로 붐볐다. 베트남은 달이 꽉 차고 가장 밝은 음력 15일을 신성한 날로 여긴다. 이날이 평일임에도 경내는 소원을 비는 발길이 이어졌다.
제단 위에는 씨가 많은 석류와 종이로 만든 아동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모두 자녀를 기원하는 제물이다. 새 생명 탄생을 기도하는 부부도 적지 않았다. 남편 탕은 “아이가 생긴다면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기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내는 “자녀를 한 명만 낳고 싶은데, 딸을 낳으면 곧바로 아들을 낳으라는 압박을 받을까봐 걱정된다”며 말끝을 흐렸다.
음력 15일인 지난 4일, 베트남 하노이 도심 사찰에서 시민들이 소원을 빌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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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안 여전한 ‘아들 집착’
베트남은 아시아에서도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나라다. 전체 경제활동인구 중 여성 비율은 48.6%(2024년 기준)로 남성(51.39%)과 큰 차이가 없다. 여성 임원 비율은 33%로 세계 평균(29%)을 웃돌고, 여성 국회의원 비율(30.3%·15기 의회)도 한국(20%·21대 국회)보다 높다.
그러나 가정 안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남아 선호 그림자가 짙다. 유교 문화 영향으로 아들이 가문을 잇고, 부모를 부양하며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믿음이 남아 있다. 재산 상속도 남자 형제, 특히 장남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런 인식은 농촌 지역으로 갈수록 강하다.
시각물_동남아 여아 100명당 남아 출생 수. 김대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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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성비 불균형도 심하다. 유엔 인구국에 따르면 2023년 베트남 출생 성비는 여아 100명당 남아 111명으로, 조사 대상 217개국 중 네 번째로 높았다. 리히텐슈타인(116명), 북마리아나 제도(115명), 아제르바이잔(112명) 다음 순이다.
특히 남부보다 보수적인 북부에서 차이가 두드러졌다. 하노이 인근 박닌성은 여아 100명당 남아 123명, 흥옌성과 타이응우옌성은 각각 120명과 118명으로 나타났다. 자연 성비인 105명을 크게 넘어서는 수치다.
지난해 베트남 하노이에서 한 아이가 물을 마시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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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과 맞물린 ‘성 선택 출산’ 확산
성비 불균형은 저출산과 맞물리며 악화됐다. 지난해 베트남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녀 수)은 1.91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도시 지역은 1.67명에 그쳤다.
과거에는 아들을 얻을 때까지 딸을 낳았다면, 지금은 교육비와 양육 부담이 커지면서 자녀 수를 한두 명으로 제한하고, ‘적어도 한 명의 아들’을 갖기 위해 성별을 골라 출산하고 있다는 의미다. 현지 인구 당국은 “초음파를 통한 태아 성 감별 등 의료 접근성 개선이 출생 성비 불균형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지 언론도 같은 우려를 전한다. 일간 뚜오이쩨는 “태아 성별 선택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지만, 많은 대형 병원이 공공연히 법을 어기고 있다”며 “일부 병원에서는 체외수정(IVF) 시술 비용 약 1억5,000만 동(약 825만 원)에, 성별을 확인하는 배아 생검 비용에 추가로 1억 동(약 550만 원)이 든다”고 보도했다.
세계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해 3월 7일 베트남 하노이 여성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유치원생들이 관람하고 있다. 여학생보다 남학생 수가 더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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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임이 아님에도 아들을 낳기 위해 시술을 택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베트남 기관지 공안년전(인민)은 “병원들이 성별 검사 후 남자아이는 ‘양성’이나 ‘아빠를 닮았다’, 여자아이는 ‘음성’이나 ‘엄마를 닮았다’는 식으로 암시한다”고 전했다.
임신중지(낙태)도 문제로 지목된다. 베트남에서는 임신 22주 이내의 임신중지가 합법이다. 세계인구리뷰에 따르면 올해 베트남 임신중지 비율은 1,000명당 64명으로, 그린란드(84.7명)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낙태권 옹호단체인 미국 구트마허 연구소는 2015~2019년 베트남 내 임신의 약 44%가 낙태로 끝났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중단 이유는 명시되지 않았다. 다만 유엔인구기금(UNFPA)은 2023년 보고서에서 “매년 약 4만6,000명의 여아 태아가 아들 선호로 사라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아들을 낳는데 도움이 된다'는 건강보조제 온라인 광고. 정자 수를 늘려주는 약품과 정력 보조제, XY염색체 환경 조성용 젤 등이 담긴 세트를 285만 동에 팔고 있다. 공안년전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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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현상은 미신과 상업으로도 이어진다. 베트남 전국 각지에서는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유명 사찰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부 사찰은 방문자의 간절함을 악용해, 남아를 점지해준다는 ‘소년 신’에게 바칠 제물이나 ‘미니 소년상’을 30~40만 동(약 1만6,500~2만2,000원)에 판매하기도 한다.
온라인에는 ‘남아 임신 보조제’라는 이름의 허위 의약품 광고도 넘쳐난다. 아들 임신 가능성을 높인다는 알칼리성 보충제나 정자·정액 검사기 등이 포함된 세트 상품이 200만~500만 동(약 11만~27만5,000원)에 팔린다.
남아 출산 축원 의식으로 유명한 베트남 하노이 사찰에 절차를 SNS로 문의하자 보내준 '소년상'과 제물 샘플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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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딸 보너스’ 실험
베트남 정부는 이 같은 현상이 단순한 인구 통계 왜곡을 넘어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제조업 비중과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율이 높은 베트남에서 여성 노동력 부족은 생산성 저하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비자발적 독신이 되는 결혼 적령기 남성이 많아지면 또 다른 사회 문제가 확산할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쿠앗 투 홍 하노이 사회개발연구소 소장은 현지 매체에 “남성이 배우자를 찾기 어려워지면 과거 중국이 겪었던 사회적 부작용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중국은 1979년부터 2015년까지 시행된 한 자녀 정책과 남아 선호, 태아 성별 감식 기술 발달로 심각한 남초 사회가 됐다. 결혼 적령기 남성이 여성보다 3,000만 명 이상 많아졌고, 배우자를 찾지 못한 남성들이 캄보디아·미얀마·라오스·베트남 등 주변국에서 신붓감을 구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결혼 사기를 당하거나 성매매·인신매매가 늘어나는 부작용도 뒤따랐다.
지난 10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 행사장에 인근 학교에서 관람 온 학생들이 참석하고 있다. 여학생 수보다 남학생 수가 더 많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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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자 베트남 정부는 칼을 빼 들었다. 지난 7월 공개된 인구법 개정안 초안에는 딸 둘 이상을 둔 가정에 1억5,000만 동의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내용이 담겼다. 내년 국회 통과가 목표다. ‘딸 낳는 것=혜택’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왜곡된 출생 성비를 자연 상태에 가깝게 돌리겠다는 구상이다.
태아 성 선택에 대한 인위적 개입을 막기 위한 조치도 강화한다. 현재 자녀 출산 전 성별을 알려주는 의료기관에는 3개월간의 자격 정지와 최대 3,000만 동(약 165만 원)의 벌금이 부과되는데, 이를 최고 1억 동까지 상향할 방침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단속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유엔인구기금(UNFPA) 성별·인권 전문가 하 틴 꾸인 아인 박사는 “태아 성별 선택 서비스를 막을 수는 있지만, 피상적인 해결책일 뿐”이라며 “진정한 변화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뿌리 깊은 믿음이 사라질 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하노이= 글·사진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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