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희미해졌기 때문인지, 내 시야가 달라져서인지 모르겠지만 도쿄역 주변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붉은 벽돌의 도쿄역 본관을 비롯한 역사적 건축물 사이로 높게 솟은 오피스 빌딩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서 있었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도쿄타워 주변을 지나는 중이었다. 2년 전쯤 서울역의 문화 공간에서 열린 헤더윅 스튜디오(Hetherwick Studio) 전시에서 청사진으로만 본 건물이 창밖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친구에게 묻자 아자부다이힐스라 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완공된 복합 개발 단지라며 누군가 추천해 준 것이 떠올랐다. 망설일 틈 없이 버스에서 내렸다. 계단식으로 굽이굽이 이어진 정원을 걷고, 내부 갤러리를 둘러보다 햇빛이 깊숙이 들어오는 지하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문득, 이제는 복합 개발 지구의 이름이 지명처럼 작동하는 시대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허드슨야드 개발이 막 완료되던 무렵, 사람들은 “맨해튼 서쪽” 대신 “허드슨야드 근처”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 이름이 지명처럼 자리 잡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서울시 조례 개정과 관련한 기사를 읽었다. 서울특별시 문화재 보호 조례의 내용 중 국가지정유산 외곽 경계 100m 밖에서 하는 건설 공사라고 하더라도 문화재에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면, 그 공사가 문화재 보존에 미치는 영향 검토를 거쳐야 한다는 조항을 삭제한 2023년 서울시 조례 개정이 유효하다는 대법원 판결에 관한 기사였다. 이로써,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 경관 보존 문제로 지연되던 종로 세운4구역 재정비 사업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라고 했다. 법이 현실의 도시를 얼마나 직접적으로 움직이는지를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기업·금융 관련 법률을 주로 다루는 변호사라서 그런지, 내 일상 공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조례나 법 개정을 주목할 기회는 많지 않다. 게다가 그곳이 내가 매일 출퇴근하고 식사하러 다니는 거리이기에 더 흥미롭게 느꼈다.
여름이면 으레 들르던 을지면옥이 3년 전 문을 닫았다. 이후 을지로는 여러 공사가 동시에 진행 중이라, 출근길에는 공사 가림막이 행렬을 이룬다. 기사를 읽으며 다시 생각했다. 도심의 변화는 단순히 건물이 올라가는 일이 아니다. 수많은 이해관계자 간의 조율, 오랜 행정 절차, 법과 제도의 조정이 겹겹이 쌓여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신문 한 장을 넘기며, 내가 매일같이 오가고 마주하는 동네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읽는다. 언젠가는 이 도심 일대를 새로운 지명으로 부를 날도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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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예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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