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08 (월)

    [매경춘추] 스승 같은 친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이미상 소설가


    가끔 나를 결정적으로 바꾼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 사람이 없었다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거나, 나라는 존재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 있겠구나 싶은 사람 말이다. 나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Y가 그렇다. 나는 Y에게 문화를 배웠다.

    한겨울에 '로미오와 줄리엣'(1996)을 보려고 종로의 영화관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줄섰던 것도 Y와 함께였다. 바스키아 전시를 보러 시내에 나왔지만 미술관을 찾지 못해 길거리를 헤매다 전시를 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귀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즐거웠던 기억이다. 돌이켜보면 중학생도 환대하는 듯한 문턱 낮은 극장과 달리 미술관이라는 낯선 공간에 들어가기 저어하여 알아서 길을 잃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홍대에 처음 가본 것도, 잡지 '키노'를 처음 사본 것도, 심야 라디오를 들었던 것도 모두 친구 덕이었다. 친구는 윤상의 '0시의 스튜디오'를 듣고, 나는 신해철의 '음악도시'를 들었다. 이런 소소한 차별화는 '따라쟁이'의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변주였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는 배낭여행을 떠나 첫날 새벽 페루 리마에서 택시 사기를 나란히 당했다.

    지금은 친구가 물어다준 것들보다 그것들에 친구라는 사람이 묻어 있는 것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게으른 나로서는 친구가 권하지 않았다면 손대지 않았을 영화와 책이 태반이다. 친구라는 필터를 통과한 것들이 좋아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우리를 매혹시킨 것은 그 자그마한 세계를 우리 둘이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어른 없이. 과학기술의 미발달로 인터넷 없이. 우리끼리.

    그런데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인지 지금껏 친구는 내 정신의 한 부분을 먹여 살리고 있다. 지난달에 종종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유튜브 실황을 봤다. 쇼팽과 모차르트의 곡을 구분하지 못하는 '클알못'이지만, 친구와 수다를 나누려고 새벽에 쇼팽을 틀어놓고 잤다. 한 달에 한 번 친구와 공연을 본다. 친구는 1년 치 커리큘럼을 짜듯 일찌감치 우리가 볼 공연들을 정해둔다. 왜 그 공연이 그 달에 선택됐는지 추리하는 것은 나만이 맛보는 애피타이저다. 내가 내건 조건은 두 가지다. 공연비가 3만~4만원 선일 것. 졸리지 않을 것. 이 한계 내에서 친구는 최선의 좌석을 고른다. 음악의 계절감을 고려한다. 좋은 선생답게 돌파를 위한 도전과 좌절을 막을 안식을 안배한다. 이번 달에 난해한 곡을 고르면 다음 달에는 멜로디가 아름다우면서도 졸음이 밀려올 즈음 쾅쾅 때려주는 곡을 고르는 식이다. 그러니 나에게 친구가 소개한 음악은 영원히 왜곡되어 들릴 것이다. 친구의 섬세한 선택이 뒤섞여 음악이 그냥 음악이 아니라 우리의 음악으로 들릴 것이다. 연말이 되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경험일까. 왜곡을 느끼는 일이 아닐까. 사적인 순간에 얻어맞아 우그러진 사물과 경험과 기억들. 그 기분 좋은 우묵함과 값진 왜곡을 만지며 스승 같은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는 겨울을 나고 싶다.

    [이미상 소설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