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창업주 이병철 1975년 본지 인터뷰
경영 소신·인재상·후계자 원칙 등 밝혀
“국민 속이는 기업, 결국 국민에 외면당해”
“가족 굳이 배척 안 해…인사, 능력이 중요”
범삼성家, 용인 선영에서 38주기 추도식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은 지난 1975년 9월 17일 내외경제신문(현 헤럴드경제)과의 인터뷰에서 “한 개인을 위한 기업은 망하고 만다. 인류나 국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업이어야만 그 사업이 발전할 수 있다”며 ‘사업보국’과 ‘인재제일’로 요약되는 자신의 경영이념을 강조했다. [헤럴드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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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어놓고 돈만 벌겠다는 생각에만 이끌려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을 위한 기업은 망하고 만다. 인류나 국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업이어야만 그 사업이 발전할 수 있다”
호암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은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인 1975년 9월 17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의 고속성장 비결을 묻는 질문에 수십 년간 지켜온 자신의 경영 철학으로 답을 대신했다.
한국 경제의 척박한 환경에서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한 굴지의 기업인으로 평가되는 이 창업회장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 잘 나서지 않았다. 대신 회고록이나 기고문,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의 경영 철학과 일화들이 전해질 뿐이다.
평소 언론 노출을 꺼리던 이 창업회장은 “나이도 70(당시 65세)에 가까워졌고 이야기 할 시간도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아는 데까지 여러분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본지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이 자리에서 매년 신입사원 면접에 직접 참석하는 이유, 후계자 선택 원칙, 문화사업을 결심하게 된 계기, 평소 건강관리 비법까지 가감없이 털어놨다.
국가 위한 기업 역할 강조 “삼성 같은 회사 30개만 있다면…”
이 창업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견을 묻자 “삼성은 어느 사업에 착수할 때나 그 사업이 우리나라 국민의 복지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냐 아니냐를 먼저 검토했다”며 삼성을 사례로 내세웠다.
그는 “삼성이 정부가 징수하는 전체 세금의 3%를 차지한다. ‘삼성 같은 회사가 30개만 있다면 국민 대부분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놀랄 것”이라며 “앞으로 삼성 같은 회사가 많이 나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업보국(事業報國·사업을 일으켜 나라에 공헌한다)’을 창업이념으로 삼았던 그답게 “기업활동 후반에 들면서 내 사업의 절반 이상을 도의심(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중시 여기는 마음) 향상에 바쳤다”며 “어떤 기업이든 국민 생활에 공헌이 크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부도나 은행 관리를 받게 된 기업들에 대해 ‘기업 운영의 도리를 소홀히 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이 창업회장은 “기업이 국민을 속여 폭리를 취한다면 결국은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해 기업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게 된다”며 “기업가가 기업윤리를 지키지 않을 때 우리나라 경제는 건전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부실기업이 속출한다는 것은 국가경제에 커다란 마이너스가 아닐 수 없다”고 걱정했다.
만사 제치고 신입 면접장 찾아…“사람이 사업 운명 좌우”
이 회장은 1957년 국내 기업 최초로 신입사원 공채를 도입하는 파격을 감행했다. 그로부터 70년 가까이 삼성의 공채 제도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창업회장은 첫 공채 때부터 신입사원 면접장에 직접 참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50년 전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지난 20년간 만사를 제쳐놓고 신규 채용면접에 참여했다”며 “사업은 자금과 계획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인재를 잘 선택한다는 것은 사업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면접에서 ‘관상’을 중요시 한 것으로 알려진 이 창업회장은 “특별히 우수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학문을 그렇게 중시할 필요가 없으며 먼저 인간을 보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면접에 50%의 비중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가의 중점은 첫째 몸이 건강해야 하고 둘째 용모가 단정해야 하며 대화를 활달하게 하느냐에 두고 있다”며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보다는 건강하고 정직·성실한 인격의 소유자를 택했다”고 밝혔다.
낙방한 인재를 향한 아쉬움도 숨기지 않았다. 이 창업회장은 “금년 공개모집에서는 3000여명의 응모자 중 150명을 채용했다. 나는 이 점을 실로 안타깝게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놓친 사람 중에는 아까운 인재가 분명히 포함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1948년 서울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할 당시 이병철 창업회장이 전화를 받고 있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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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수표에 도장 찍어본 적 없다”…믿고 맡기는 인재경영
이 창업회장은 인터뷰에서 “26세 때 처음 기업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전표나 수표에 직접 도장을 찍어본 일이 한 번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만큼 일단 사람을 뽑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기고 신뢰를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인사 원칙으로 ▷공정한 승진 기회 ▷적재적소 배치 ▷정당한 보수를 강조한 이 창업회장은 “사장에서 말단 사원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지도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전(全) 책임을 맡겨 자기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고 역설했다.
신상필벌도 엄격했다. 그는 “자기가 맡은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 일을 저지르는 것은 용서하되 맡은 소임을 게을리해 사고를 내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라고 말했다.
이어 “역량이 있어야 하고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갑자기 얻을 수는 없고 꾸준한 인재 양성을 통해 구할 수 있다”며 “삼성은 지금까지 인재 양성에 중점을 둬왔고 앞으로 삼성이 존재하는 한 이 노력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후계자에 대한 생각도 숨기지 않았다. 이 창업회장은 “인사에 있어 내 가족을 굳이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각별히 신경을 기울여 공정한 인사원칙에 어긋남이 없도록 노력했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내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줄 것인가 아니면 외부인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묻는다면 인정으로 봐서 똑같은 여건이라면 한 집안 안에서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본다. 그렇지만 비록 아들이라 하더라도 내 자리를 맡아 할 능력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구태여 넘겨 줄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문화유산 환수에도 헌신…“삼성문화재단 설립은 국가 위한 일”
생전 고미술품 애호가로 유명했던 이 창업회장은 우리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환수를 위해 발 벗고 뛰었다. 1965년에는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이 창업회장은 “10년 전 국가를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 아래 문화사업을 일으키기로 결심했었다”며 “당시 개인재산 180억원 중 60억원으로 문화재단을 세워 우리나라의 도의문화를 위해 봉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창업회장은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을 기반으로 1982년에는 호암미술관을 열었다. 호암미술관을 통해 문화유산을 영구 보존하고, 국민들이 이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경제가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의를 잊고 윤리를 저버린다면 우리나라 역사와 사회를 재건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도의문화 계몽에 투자한 자금은 한정돼 국민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줬는지 모르겠으나 삼성문화재단은 앞으로 계속 도의문화를 확립하는 사업에 노력을 집결시킬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창업회장의 사명감은 고 이건희 선대회장을 거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21년 이재용 회장을 비롯한 유족은 이 선대회장의 개인 소장품 중 2만3000여점을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기증하며 고인의 뜻을 기렸다.
이 창업회장은 인터뷰 말미 건강관리 비법을 묻는 질문엔 “별다른 방법은 없으나 규칙적으로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있다. 저녁 10시에 잠자리에 들어 8시간 수면을 취한다”고 답했다.
김현일·김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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